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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9:35-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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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69318 |
http://dabia.net/xe/1069318
설교보기 : https://youtu.be/a0drDGiX8Yc
성경본문 : 요한복음 9:35~41
바리새인의 ‘죄’ 문제
사순절 셋째 주일, 2023년 3월 19일
복음서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에게 호의적인 사람들도 있고 적대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식한 사람들도 있고 지식인들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있고 부자들도 있었습니다. 난치병을 앓는 이들이나 장애인들도 있었고 건강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께 가장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이들은 바리새인(바리새파)입니다. 바리새파의 원래 뜻은 ‘구별된 자’입니다. 좋은 뜻입니다. 바리새파 운동은 기원전 167~142년에 유대인들과 셀레우코스 왕조 사이에서 벌어진 마카베오 전쟁 이후부터 큰 세력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종교적 엘리트 집단인 그들의 특징은 율법 수호에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 정권을 거부하고 새로운 변혁을 꿈꾸었습니다. 이들과 경쟁 관계에 있던 사두개파는 부자들이면서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로마 정권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바울도 본래 바리새파에 속했습니다. 기원후 70년에 끝난 유대 전쟁으로 인해서 바리새파가 실제적으로 유대교의 주류 세력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주도한 얌니야 종교회의(기원후 90년)에서는 구약 39권이 정경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유대교는 그때까지 느슨하게 관계를 맺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 준수를 더 강력하게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율법 종교로 재무장한 유대교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거부하고 유대교와 완전히 다른 길을 갈 것인지를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배경 가운데서 요한복음이 기록되었기에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식일 문제
요한복음 9장은 예수께서 맹인을 고친 사건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문제 제기와 그것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람의 장애가 ‘누구의 죄 때문이냐?’라고 묻습니다. 예수께서는 죄로 인해서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시각장애인이 시력을 되찾은 날이 하필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어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으니 예수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고, 어떤 이들은 예수가 놀라운 표적을 행했으니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과 그의 부모를 압박합니다. 예수를 부정하라고 말입니다. 심지어 모세를 끌어들입니다. 자신들은 모세의 제자라서 율법적인 정통성이 있으나 예수는 ‘어디서 왔는지’ 출처도 불분명한 ‘듣보잡’이니 그를 감싸지 말라고 말입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바리새인들의 강요와 설득에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거둬들이지 않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요 9:35절부터 새로운 국면이 펼쳐집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심한 공격과 위협을 받은 이 사람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에게 “네가 인자(휘오스 투 안트로푸)를 믿느냐?”라고 묻습니다. 인자는 다른 사본에 ‘하나님의 아들’(휘오스 투 데우)로 나옵니다. 이 사람은 믿기를 원한다고 대답합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다.’라고 대답하시자 이 사람은 ‘주님, 저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을 들으신 예수께서 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장 원초적인 신앙고백이 들어있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두 종류의 인간이 나옵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과 보는 자들입니다. 보지 못하는 자는 선천성 시각장애인이고, 보는 자는 바리새인입니다. 시각장애인은 보게 하고 바리새인은 못 보게 하는 게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이라는 이 말이 정당한가요? 시각장애인을 보게 하는 거는 바람직하나 바리새인을 보지 못하게 할 필요까지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기분 나빴을 겁니다. ‘우리도 맹인이라는 말인가?’ 하고 따져 묻습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머니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와야 하느냐고 반문한 니고데모의 경우처럼 그들은 예수님의 영적인 말씀을 육체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예수께서 41절에서 대답하십니다. 39절보다 더 노골적인 표현입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예수께서는 이 대목에서 죄 문제를 끌어들였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바리새인을 비롯한 전통적 유대인들이 시각장애를 죄 때문이라고 본다는 데에 있습니다. 앞에서 짚었듯이 이 이야기 처음 단락에서 제자들도 시각장애인의 운명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은 졸지에 나락으로 떨어진 욥을 향해서 회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이 인격적으로 반듯하지 못하거나 경건하지 않아서 ‘누구의 죄’ 운운한 게 아닙니다. 인간 삶의 심연에는 파악할 수 없는 악의 힘이 존재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가 나옵니다. 뱀이 아와를 유혹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오히려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진다고 말입니다. 눈이 밝아진다는 말을 듣고 그 열매를 보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창 3:6) 했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그 열매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즉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고 싶다는 욕망과 확신이 죄의 본질입니다. 창세기는 1장과 2장에서 창조 이야기를 거론한 뒤에 곧장 3장에서 인간 타락을 말하고, 4장에서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 이야기를 다룹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웠던 창조가 즉시 부정되는 듯한 이야기 구성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인간 삶을 파괴하는 죄가 존재론적인 깊이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겁니다. 이런 관점이 신학 용어로는 원죄이고 철학 용어로는 ‘악의 평범성’(한나 아렌트)입니다.
율법과 죄
바리새인들에게 문제는 그 죄와 악을 율법에서 찾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죄가 없는 삶이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죄가 있는 삶입니다. 의인과 죄인의 기준이 율법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리새인들은 시각장애인을 고친 날이 안식일이었기에 트집을 잡은 겁니다. 안식일 개념 자체는 물론 중요합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와 출애굽 정신을 개인과 사회적 삶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유대교 역사에서, 특히 바리새파 전통에서 안식일 제도가 절대 규범으로 작동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안식일 개념의 근본정신인 창조와 해방은 실종되고 안식일 규정만 인간의 삶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눈으로 보면 안식일에 시각장애인을 고친 예수도 죄인입니다. 안식일 규정에 충실한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의인이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아는 사람들이고, 눈을 뜬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향한 그들의 진정성과 열정만큼은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바로 그런 생각이 우리의 삶을 왜곡시키는 근본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율법 범주로만 세상을 판단하다 보니 근본을 놓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당대 지식인이고 종교적으로 존경받을만한 사람들이지만 율법 범주에 갇히니까 무엇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무엇이 상대적으로 중요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을 고친 사건이 오히려 안식일의 본질인 창조와 해방 사건이라는 사실을 놓친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해방을 가로막는 세력이 죄니까 종교 전문가들인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죄의 세력에 묶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 검찰 조직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듯이 나름 전문가들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에게서 본질의 왜곡이 자주 일어납니다. 한국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리새인처럼 대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지도자들도 제법 많습니다.
작년 연말에 저는 국회 정문 옆에서 ‘차별금지법 반대 1인 시위’에 나선 목사들에 관한 뉴스를 인터넷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대부분이 대형교회 목사들이었습니다. 평소에 다른 대형교회 목사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개혁적인 목회를 지향하던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가 그 릴레이 1인 시위에 동참한 것을 보고 의외라고 생각했습니다. 차별금지법 반대의 핵심은 동성애 문제입니다. 그들은 동성애 행위와 동성애자를 구분합니다. 그게 구분되는지도 이해하기 힘들기는 합니다. 동성애자는 사랑하지만, 동성애는 성경이 분명히 죄라고 규정하니까 인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저는 여기서 그 문제를 소상하게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동성애에 관한 성경의 진술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십계명과 같은 율법입니다. 안식일에도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노동해야 합니다. 병도 고쳐야 합니다. 소가 구덩이에 빠졌으면 건져내야 합니다. 성소수자라는 말에 알 수 있듯이 동성애도 이런 특별한 상황이라고 보면 안 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지난 2월 초 프란치스코 교황은 언론 인터뷰에서 동성애를 범죄로 규정한 법은 죄이고 불의이며, 동성애 성향인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교회로부터 환영받아야 한다고 밝혔고, 영국 성공회의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와 이안 그린쉴즈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 의장도 이러한 교황의 발언을 지지했습니다. 세계 교회는 대부분 동성애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유독 한국 교회만 자신들이 선과 악을 구분할 줄 아는 자리에 올라선 것처럼 독단적입니다. 저는 그 1인 시위에 나선 목사들이 바로 시각장애인을 안식일에 고쳤다고 예수께 시비 걸던 바리새인들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이성애라는 도그마에 사로잡혀서 성소수자인 동성애자들을 배척하는 당신들이야말로 죄의 세력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에게 위협받고 무시당하던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거론한 유대교 신학에 관해서는 깊이 아는 게 없으나 예수라는 사람이 자기를 고쳤다는 사실은 너무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 근거해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이시고, 따라서 죄인이 아니라고 줄곧 주장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에게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려느냐?” 하고 몰아붙였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바리새인들에게는 율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가 절대적인 기준이었으나 시각장애인이었던 이 사람에게는 생명을 구하는지 아닌지가 절대적인 기준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율법에 따른 어떤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보았습니다. 그럴 때만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현실성(ultimate reality)이 눈에 들어옵니다. 불교 어느 고승이 열반송으로 말했다 하는 문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율법 범주와 도그마로만 예수를 판단했으나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자기 앞에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그대로 직관했습니다. 누가 맹인인가요? 누가 죄인인가요?
불행의 원인과 책임성
장애인이었던 사람을 죄인으로 간주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오히려 죄가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나친 비약은 아닐까요? 바리새인들이 붙들고 있는 율법이 해체된다면 세상은 무정부와 같은 혼란에 빠져드는 건 아닐까요? 바울도 로마 정권의 사회 체제를 존중하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문자적 적용이 문제입니다.
다시 이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제자들은 누구의 죄로 인해서 이 사람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서 비참하게 사느냐고 예수께 물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에 죄인이라는 바리새인들의 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생각과 말이 실제로 가리키는 바는 모든 불행의 원인과 책임을 그걸 당한 사람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네가 당한 모든 불행은 너의 문제니까 네가 알아서 해결하라.’라고 말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시각장애인을 다음날 고쳐도 되는데 굳이 안식일에 고치는 예수의 행위는 개인 문제를 사회 문제로 끌어들여서 사회 체계를 허무는 무책임한 행태입니다.
21세기에도 이런 시각과 목소리는 계속됩니다. 신자유주의가 대세로 자리를 잡으면서 이런 현상은 더 노골화됩니다. 신자유주의는 무한 경쟁 체제를 통해서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입니다. 각자도생의 원리입니다. 따라서 개인의 가난 문제는 사회나 국가가 책임질 수 없습니다. 각자의 책임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너도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아파트 경비원처럼 살게 될 거야.’라는 말이 그런 생각의 한 단면입니다. 마트 계산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공공 화장실 청소하는 분들도 그런 대우를 받습니다. 가난과 장애와 재난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건 인간의 삶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 생명체가 하나님의 창조라는 사실까지도 부정하는 겁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사람의 운명은 죄로 인한 게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을 겁니다. ‘스스로 본다고 자랑하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을 바리새인들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철두철미한 안식일 준수를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겼지만, 예수님은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돕는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신학적인 관점이 다르면 인간 삶에 관한 생각도 다르고 대처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바리새인들은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을 위협하고 무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슬리면서 못살게 굴었습니다. 요 9:34절에 따르면 그들은 이 사람을 쫓아냈다고 합니다. 일종의 출교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그들은 확신했겠지요. 이렇게 자신들의 종교적, 정치적 규범 안에서 다른 이들을 재단하는 삶의 태도가 바로 죄 아니면 무엇이 죄란 말입니까?
21세기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체로 바리새인처럼 살아갑니다. 교회는 그런 이들을 치켜세워서 목사와 안수 집사와 장로로 세웁니다. 예수께서 한국 교회에 오신다면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에게 경고하신 그 말씀을 그대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41절을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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