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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열왕기상 3:16~28
본문은 솔로몬의 지혜를 찬양하는 이야기로 너무나 유명한 예입니다. 두 창기가 있었는데, 사실 저는 이 대목에서 고개가 갸웃거립니다. 왜 하필 창기일까요? 평범한 어머니가 등장한다고 해서 내러티브의 의미가 달라지는 걸까요? 여인의 직업을 설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아무튼, 두 여인은 각기 아들을 낳았습니다. 다시 궁금해집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특정할 수 있는 아기일까요? 이 이야기에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는 사실은 아무 문제도 아닌가요? 아무튼, 한 여인이 그만 실수로 잠자다가 아기를 깔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또 의아해집니다. 아니 어머니가 부주의로 아기를 압사했다는 겁니까? 그럴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무튼, 이 여인은 그 순간 기지(?)를 발휘하여 다른 여인의 아들과 죽은 자기 아들을 바꿔치기하였습니다. 여기서 또 의문이 듭니다. 여인은 죽은 아기에 대한 슬픔 대신 남의 아기, 그것도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아기에 대한 애착이 그토록 컸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게다가 자기 아들이 아닌 남의 아기를 자기 아들처럼 키울 만큼 모성애와 인류애가 탁월하였을까요? 아무튼, 그 여인은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거짓을 연기합니다.
이 문제는 법정으로 번졌습니다. 모르기는 해도 마을마다 법관 역할을 하는 장로나 지도자가 있었을 터이나(신 21:18~21, 삿 4:5, 삼하 15:2~4) 이 문제 해결이 하도 어려워서 솔로몬 왕에게까지 올라왔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은 솔로몬이 예상 밖의 판결을 내렸습니다. “살아 있는 이 아이를 둘로 나누어서, 반쪽은 이 여자에게 주고, 나머지 반쪽은 저 여자에게 주어라”(3:25). 세상에 이런 판결이 어디 있을 수 있습니까? 거짓말하는 여인도 미쳤지만 재판하는 왕도 정신이 나갔습니다. 재판정에 있던 모든 이들이 까무러치도록 놀랐습니다. 결국 생모가 포기하였습니다. 포기한 것은 아들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재판에 대한 기대도 포기하였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이렇게 진다고 생각하니 속상합니다. 생모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과 재판을 포기하므로 엉터리 재판관 솔로몬을 탄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여인은 이 판결을 수용하겠다고 하니 사람이 아닙니다(26). 아무튼, 여기에 기가 막힌 반전이 있습니다. 이 재판은 진실과 거짓, 사랑과 논리, 감정과 이성, 생명과 죽음에 대한 명쾌한 판결로 솔로몬의 명성을 높였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저는 두 가지 점을 주목합니다. 하나는 두 여인을 창기로 설정한 이유입니다. 왕 앞에 송사할 권리가 천한 신분의 사회적 약자에게도 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신 27:19). 누구라도 법외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난민조차도 당당하게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살려달라며 찾아온 난민을 쫓아내고, 우리 곁에 다가온 이방인에 대하여 불신과 증오의 눈으로 보는 일부 교인들의 태도는 복음적이지도 않고 보편적 인류애도 아닙니다. 사회적 약자에게 비굴함을 강요하는 사회는 나쁜 사회입니다. 가난한 자는 싸구려 불량식품을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지도자가 있는 세상은 지옥과 가깝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 재판 과정을 생모가 주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17~21). 우리 사회에서도 조금 더 의로운 이들의 목소리가 높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니콜라 푸생(1594?~1665)의 <아기를 잃은 여인>에서 보듯 거짓말쟁이가 더 공격적이고 적극적입니다. 무능하고 파렴치한 거짓말쟁이가 세상을 주도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진실이 거짓에 지지 않도록 정신 차려야 합니다. 아무튼, 권력을 가진 자가 공정하면 백성의 신망을 얻습니다(28). 세상 살아내기가 그때나 지금이나 버겁습니다. 한 줄기 빛이 그립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 모든 어머니를 은총으로 이끌어주십시오. 아무리 세상이 험하고 사악하더라도 악이 모정을 이기지 못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무튼, 진실의 승리를 보여 주십시오. 언제나….
2023. 9. 10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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