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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와 최선 사이
열왕기상 6:1~13
우리는 솔로몬의 성전에 대하여 몇 가지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지성이 지극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신다는 착각입니다. 좋은 재료와 지극정성이 어울려 극상의 것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만족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순진한 생각이 무조건 틀렸다고 구박할 것은 아니더라도 그런 관점이라면 무당 종교의 지극정성은 계시 종교의 봉헌보다 훨씬 우월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최고인지, 최선인지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는 성전을 특정화하므로 하나님의 편재성에 심각한 혼돈을 주었습니다. 그동안 거룩하신 하나님은 백성 가운데에 존재하였습니다. 백성이 거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은 백성과 따로 구분된 특화된 장소에 고립된 분으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백성이 하나님을 경배하려면 성전으로 와야 했습니다. 셋째는 성전이 영원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여기는 무지한 이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상천지가 변해도 성전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전은 속절없이 무참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때 유대인의 믿음도 붕괴되었습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포로기의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성전 신학을 정립하였습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이지 교회는 아닙니다.
성전 건축의 시점,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6:1)이라는 언급은 성전 건축이 이스라엘과 인류의 구원과 연관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성전은 거대하게 흐르는 구원의 강줄기의 한 굽이입니다. 그 흐름은 대양에 이르러 만인이 그 큰 권능을 알게 될 것입니다(시 106:8). 하나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은 과정이자 그림자이지 실체나 본질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전에 터해 삶을 유지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성전 신화를 만들었고 그 폐해는 오늘 교회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성전이나 교회는 만능 부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십니다. 하나님의 편재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특정 장소로 제한하고 독점하는 일은 불신앙 못지않게 나쁩니다. 우상은 우리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범위 안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기 성찰과 온전한 분별력을 가져야겠습니다. 잘못 들어선 길은 간만큼 돌아와야 합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훨씬 중요합니다.
“네가 내 법도와 율례를 따르고, 또 나의 계명에 순종하여, 그대로 그것을 지키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약속한 바를 네게서 이루겠다. 또한 나는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그들 가운데서 함께 살겠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6:12~13).
자칫하면,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이런 복을 주셨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과연 성전 건축 행위가 하도 기특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다윗 언약의 계승자임을 확인하는 이 장면은 성전 건축이라는 특별한 행위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법도와 율례와 계명 등 일반적인 가르침의 순종에 대한 응답입니다. 어쩌다 잘하기보다 평소에 잘해야 합니다. 벼락치기 공부나 족집게 과외로 점수를 올리는 일은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은 성실한 일상에 대한 보답이지 우연이나 요행이 아닙니다.
하나님, 성전과 교회가 우상이 되는 웃지 못할 시대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성찰이 없고 지혜를 백안시하는 이들에 의하여 교회는 절대화되고 있습니다. 중세의 교회 절대화 신화를 깨트린 개신교 전통이 무색합니다. 이 시대 교회가 제자리를 잘 지킬 수 있도록 지도자들을 각성시켜주십시오.
찬송 :208 내 주의 나라와 https://www.youtube.com/watch?v=_MZaNarvU0k
2023. 9. 1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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