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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0:2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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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71250 |
설교보기 : https://youtu.be/BU7e4XJFRvQ
성경본문 : 요한복음 20:24~31
믿음의 깊이
요20:24-31, 부활절 둘째 주일, 2023년 4월 16일
부활 신앙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정체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증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복음 선포도 헛것이고 믿음도 헛것이라고(고전 15:14, 17, 19 참조) 단정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일 다음 날인 주일에 예배를 드리게 된 이유에는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로 자리를 잡게 되는 정치적 배경이 있기는 하나 근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일에 일어났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그 출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경험이 없으면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안타깝게도 일종의 신앙적 구호로만 남아있습니다. 부활절도 그럴듯한 행사를 위한 절기로 전락했습니다. 일주일 전 서울 영락교회에서 열린 부활절 연합예배에 그리스도인이 아닌 대통령이 참석해서 축사했다고 하는군요. 양쪽의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져서 벌어진 일이겠지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부활을 믿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신약성경에는 예수 부활에 관한 직접적인 이야기가 예상외로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부활 신앙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가 말을 할 때마다 ‘당신을 사랑해’라고 반복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부활 믿음을 가장 자세하고도 체계 있게 다루는 본문은 고전 15장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라고 말한 다음에 이어서 22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라고 주장합니다. 이 문장에 나오는 ‘삶을 얻으리라.’라는 헬라어는 ζωοποιηθ?σονται입니다. KJV은 그 단어를 shall be made alive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alive(독일어 lebendig)가 핵심입니다. 즉 부활 사건의 본질은 ‘살아있음’입니다. 부활이 무엇인지를 알기 원하는 사람은 ‘살아있음’이 무엇인지를 먼저 종합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단순히 숨 잘 쉬고 잘 먹기만 하면 살아있는 것일까요?
복음서는 바울의 편지와 다른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스토리 텔링 방식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빈 무덤’ 전승이라고 합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이야기와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난 이야기가 서사 형식으로 서로 결탁해 있습니다. 일단의 여성들이 예수께서 묻힌 무덤에 갔더니 예수 시신은 없고 흰옷 입은 천사만 있었다거나 제자 두 명이 엠마오로 가는 도중에 나타난 부활의 주님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입니다. 특이하게도 이런 종류의 빈 무덤 전승이 바울의 글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이 활동하던 기원후 40~60년 사이에는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가 기록되던 1세기 후반의 교회 상황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한 제자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직접 증언할 제자들이 없으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들의 경험을 글로 남겨야 했습니다.
도마 이야기
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 부활, 즉 빈 무덤 이야기는 중복되기도 하고 약간씩 다르기도 합니다. 가장 짤막하게 전하는 복음서는 마가복음입니다. 막 16:1~8절에는 안식일을 앞두고 급하게 매장한 예수님 시신을 수습하려고 안식 후 첫날 이른 시각에 무덤으로 간 일단의 여성들이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본 현상을 전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뒤로 짤막하게 나오는 몇몇 단편들은 사본에 따라서 빠졌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부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중에서 도마(Thomas) 이야기가 특별합니다. 이 이야기로 인해서 도마에게는 의심 많은 제자라는 별칭이 붙어 다니게 되었습니다. 도마는 아마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도마는 요한복음의 독립 전승인 마르다와 마리아 오빠 나사로를 예수께서 다시 살리신 이야기에도 등장합니다. 예수께 어떤 위기가 닥칠지 모른다는 사실을 직감한 도마는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하자.”(요 11:16)라고 큰소리쳤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마침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주님을 보았다고 말하자 도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도마의 주장이 크게 잘못된 건 아닙니다. 상식의 차원에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무조건 믿을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다. 요한복음 공동체에 속한 적지 않은 이들 역시 도마의 심정이었을 겁니다. 신앙이 없어서 그렇게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공개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무덤에 묻힌 예수께서 문이 닫힌 방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렀고, 그걸 직접 경험한 제자들도 없는 상태니까 더 힘듭니다. 오늘날도 교회 밖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많은 그리스도인도 도마의 발언에 동조할 것입니다. 그래서 일종의 실용주의 신앙이라 할 기복주의와 도덕주의와 경건주의,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심리주의적 신앙행태에 기울어집니다. 이런 신앙행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이물질처럼 느껴집니다.
요 20:26절에 따르면 여드레 후에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문은 닫혔으나 도마는 다행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여러분에게 평화!’라고 인사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본래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으셨기에 유대인들처럼 히브리어 ‘샬롬’이라고 하시던지, 아람어 ‘셸람’이라고 하셨을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실제로 손을 넣어봤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눈으로 부활의 주님을 보았으니 굳이 손을 넣을 필요까지는 없었겠지요.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헬라어 성경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나의 주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 Κ?ρι?? μου κα? ? Θε?? μου)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의 가장 기본적인 골격을 약간 변형한 문장입니다. 기본 골격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29절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27절에서 ‘믿음’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왔고, 여기 29절에서도 두 번 반복합니다. 듣기에 따라서 어색할 수 있는 도마의 손가락 이야기를 언급하면서까지 요한이 말하고 싶은 핵심이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앞에서 짚었듯이 예수님을 직접 경험했던 제자들을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세상에 없습니다. 베드로와 바울과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는 공교롭게 비슷한 시기인 기원후 60년대에 모두 죽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시절로부터 최소한 30년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본 이들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유대교의 회당으로부터 쫓겨나기 시작한 시절이기도 합니다. 요한은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을 어딘가 부족하거나 어색하게 생각하는 이들을 향해서 오히려 ‘복되도다.’(μακ?ριοι, 마 5장 팔복 참조)라고 격려했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라는 오늘의 ‘둘째 말씀’에 나오는 벧전 1:8절도 같은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니 그러니까 더더욱 복된 사람들입니다.
신뢰로서의 믿음
보지 못하고 믿는다는 말은 자칫 오해될 수 있습니다. 믿을만한 근거를 아예 묻지 말고 무조건 믿는 게 옳은 것처럼 말입니다. 한국교회는 이런 열광주의적 믿음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궁금한 내용을 자꾸 물으면 교회에서는 믿음이 없는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의 역사 비평에 관한 질문도 교회에서는 금기시됩니다. 부활 자체에 관해서 궁금하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버텨내기 힘듭니다. 동성애, 타종교, 공산주의에 대한 질문은 아예 봉쇄됩니다. 그래서 생각이 있는 신자들은 아예 입을 다물거나 다른 데서 그 답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다가 반기독교 영향을 받아서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두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의 차원은 신뢰입니다. 영어 trust(독일어 Vertrauen)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이 신뢰할만하니까 믿는 거지 아무런 근거 없이 믿는 게 아닙니다. 구약은 하나님이 왜 믿을만한 대상인지를 끊임없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서 젖고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만나와 메추라기와 샘물을 허락하셨습니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왜 하나님의 아들인지에 관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본질을 정확하게 제시하셨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위선을 까발리셨습니다. 자기 자신과 율법에 묶인 이들을 해방하셨습니다. 삶을 하나님 안에서의 축제로 끌어올리셨습니다. 한 마디로 압축하면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제자들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생명 사건이 발생했기에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신뢰할만한 대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려면 지성은 필수입니다. 신학 작업도 필수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이런 지성적인 신학 논쟁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왜 온전히 신이며 온전한 사람인지에 대한 논쟁과 삼위일체 논쟁이, 그리고 영지주의와의 이단 논쟁이 교부 시대에 뜨거웠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 교회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세계 전체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사실에 대한 신학 논쟁도 1960대부터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가끔 교회에서 지성 무용론과 신학 무용론이 나오는 걸 봅니다. 유치한 발상입니다. 교회가 신학교는 아니나 교회의 모든 일은 신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지성적인 공동체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잘 안 되는 이유는 한편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지성적인 생각 자체가 수고롭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일반적인 종교심에 근거해도 교회가 얼마든지 운영되기 때문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을 근거로 지성이 배제된 맹신을 강조하다가는 통일교와 신천지 등등, 이단의 발호를 막을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신뢰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믿음의 또 다른 차원은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믿음의 깊이입니다. 참된 신앙이라고 해도 됩니다. 이런 믿음의 깊이를 영어로는 believe라 합니다. 이 단어가 가리키는 믿음은 오늘 본문이 가리키는 대로 ‘보지 않고도 믿는 것’입니다. 예수 승천 이후로 부활의 주님이 교회에 현상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가운데서도 믿음이 가능한 이유는 눈으로 보고 손가락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이 확실한 게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씨앗에서 꽃을 보거나 손가락으로 확인할 수는 없으나 씨앗에서 꽃이 나온다는 사실은 가장 확실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요한 공동체 구성원들이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었던 이유는 부활에 관한 교회 공동체의 증언이 역사를 통해서 그들에게 주어졌다는 데에 있습니다. 개인적인 확신이 아니라 부활에 관한 공동체의 증언을 진리의 근거로 삼은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이 교회 공동체를 떠나서 혼자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집단 지성이라는 말이 있듯이 집단 영성은 개인 영성을 초월합니다. 개개인으로서의 신자가 아무리 뛰어나도 교회 공동체 전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예전 예배를 드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2천 년 그리스도교 영성이 예전 안에 오롯이 담겨 있기에 그 예전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현재를 초월하여 그리스도교 영성의 과거와 미래에 참여하는 겁니다.
절대적인 신뢰라는 말은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완전히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의 손은 창조와 종말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강력할 뿐만 아니라 선합니다. 자기 아들을 버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능력입니다. 이런 믿음은 지성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거기에 종속되지 않으며, 자연과학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거기에 완전히 지배받지도 않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어떻게 상대방과 ‘밀당’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밀당’을 한다는 말은 그가 사랑의 능력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하나님께 자신의 미래를 완전히 맡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고, 부정할 수도 없으며, 또한 자기 삶을 낮춰보지도 않습니다. 말 그대로 절대적인 ‘긍정’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것이 곧 믿음의 깊이 아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이런 절대적인 믿음을 허황하다고 말하며, 그런 믿음에는 자기들이 아는 확실성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과연 그럴까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인생살이의 궁극적인 확실성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보십시오. 그들도 사실은 세속의 자리에서 절대적으로 믿을만한 대상을 모색하며 삽니다. 예를 들어서 정치에 인생을 거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나름 정치적 성과를 이룬 그들의 삶이 얼마나 초라한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그런 일들은 어린아이들의 소꿉놀이나 동네 싸움과 비슷하니까 성공한 이들을 너무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거꾸로 세상에는 절대적인 믿음의 대상이 없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일종의 영적인 고향 상실입니다. 풍요로운 현대사회에 허무주의와 냉소주의가 아주 강력합니다. 영혼의 자유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인생이 별거냐, 그냥 재미있고 성실하게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 죽으면 충분한 인생이지, 하면서 인생을 달관한 듯이 말합니다. 인생이 별것 아니라면 재미있고 성실하게 사는 것 자체도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요.
저와 여러분은 믿음의 깊이에서 그리스도교가 긴 역사를 통해서 증언하는 하나님께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처럼 우리의 미래를 완전히 맡기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믿음을 흉내 내는 것과 믿음의 깊이로 들어가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니까요. 이런 점에서 믿음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믿음의 깊이에 들어간다면 여러분은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31절이 말하듯이 하나님의 생명을, 즉 영혼의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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