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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9:1~9
오늘 본문을 읽으며 두 가지 의문이 듭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두 번 나타나셨다(9:2, 11:9)는 점입니다. 한번은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나타나셔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기를 바라느냐? 나에게 구하여라”(3:5)고 하셨습니다. 이때 솔로몬은 백성을 바르게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였습니다(3:9). 하나님이 이를 만족하시고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화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두 번째 나타나신 일은 솔로몬이 성전 봉헌식의 기도를 마친 후입니다.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이 의아합니다. 신정국가인 이스라엘 왕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두 번에 불과하다는 점이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시로 솔로몬에게 주님의 뜻을 지시하시고, 솔로몬은 무상시로 하나님을 대면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 시대에 하나님은 수시로 나타나셨습니다. 다윗 역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과 소통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솔로몬에게는 두 번밖에 나타나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가 하나님과 왕의 소통을 막았을까요? 솔로몬이 이룬 부귀와 영화와 많은 처첩들이 하나님과의 소통을 막았을까요? 지혜가 좋은 것이기는 하고, 부귀영화가 부러운 것이기는 해도 만일 그로 인하여 하나님과 소통이 막힌다면 과연 복이라고 할 수 있을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난과 역경이 힘겨운 현실이기는 하지만 그로 인하여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다면 도리어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을 누린다고 지나치게 자만해서도 안 되지만, 역경에 처한 현실을 비관만 해서도 안 됩니다. 좋은 일이 좋지만도 않고 나쁜 일이 나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복이 화가 될 수 있고, 화가 복이 될 수 있는 기막힌 패러독스가 존재합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응답이 특별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성전봉헌식 때 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네 아버지 다윗처럼 살아라. 그리하여 내가 네게 명한 것을 실천하고, 내가 네게 준 율례와 규례를 온전한 마음으로 올바르게 지켜라. 그리하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을 사람이 그에게서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약속한 대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네 왕좌를, 영원히 지켜 주겠다”(9:4~5).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응답이 전혀 특별하지 않습니다. 7년이나 공을 들여 지은 성전이고, 다윗의 간절함이 스민 곳이자 솔로몬의 특심이 담긴 성전인데 이런 특별한 선물(?)을 받으신 하나님의 응답치고는 너무 일반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면 왕위가 보존되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 거룩한 성전이 웃음거리가 될 정도로 비참해질 것이라는 말씀은 오래된 하나님의 보편적 계명입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 2:16~17). 하나님과 최초의 인류인 아담이 맺은 이 언약은 한 마디로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입니다. 이를 신학에서는 ‘행위언약’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순종을 조건으로 생명과 죽음을 약속하셨습니다. 성전 건축을 한 솔로몬의 열심과 특심이 하나님의 일반적 계명을 초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도 가난하고 힘들 때 하나님을 더 열심히 찾았습니다. 먹고살기에 흡족한 세상이 되면서 하나님을 등한히 하기 마련입니다. 복을 주셨지만 그 복을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저희에게 돌이키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특별한 은총에 기대 일반적 은혜를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2023. 9. 2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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