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요6:5-9 |
---|---|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6장 5절-9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5절-7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무리’란 많은 사람을 말하기도 하지만 신앙적으로는 주님과 의사단일이 되지 못한 제각각의 소원 목적을 가진 사람들을 ‘무리’라고 한다. 하나님 집의 자녀들은 주님과 의사단일이 되어야 한다.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우리가 빌립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그 마음을 아는데,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그 때 당시의 장소에 있다면 주님께서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을 하겠느냐?
구약 때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려면 입을 거, 먹을 거, 잘 것 등을 어떻게 준비를 하고, 들고 다니겠느냐? 그러니까 이 많은 사람을 광야로 나가라고 하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같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라고 한 것은 자기의 집이나 논밭도 다 버리고 가라는 것이니 이것도 가다가 죽으라는 말과 같다.
세상사람들의 계산법은 다 이렇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면으로 생각을 해야 하는데도 대부분 육적인 개념으로 생각을 해서 일반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을 한다. 성경을 이런 눈으로 보면 아무리 봐도 자기에겐 방언이 되어버린다. 못 알아듣는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빌립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시험하는 말씀인 줄도 모르고 각 사람에게 넉넉히는 못 주어도 200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빌립은 갈릴리 바다에서 산 고기를 잡아다 파는 어부였기 때문에 이런 계산은 빠르다.
빌립이 예수님과 이런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직업상 빌립보다도 돈 계산이 훨씬 더 빠른 세리마태도 그 옆에 있었을 텐데 나서서 말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면 오늘날 내가 그 때 그 장소에 있었다면 그곳의 사람들을 다 먹이려면 돈이 얼마나 든다고 말을 했을까? 이런 물음과 답변이 가정적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실질적으로 항상 있는 거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물으실 때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 섭리에 의해, 하나님의 허락 하에 돌아간다는 것과, 구약에서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의 만나를 먹이신 하나님의 역사를 염두에 두면서 ‘주님 당신이 알리이다’ 라고 대답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가 성경을 깨달을 때 앞선 것을 거울 같이 모르면 바로 깨닫기가 힘들다. 물론 먼저는 글씨를 읽을 수 있도록 눈이 밝아서 성경을 읽어야 성경을 표면적으로라도 알 수 있다. 성경도 안 읽는다면 누가 성경에 대해 말을 해도 어떻게 알아듣겠느냐? 그런 차에다 맨날 ‘충성봉사를 하면 복 받는다’ 라는 설교를 듣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겠느냐? 이런 식으로 믿게 되면 미신을 믿는 사람들처럼 믿게 되고, 이런 사람은 미래가 없다. 고통뿐이다. 외부에서 작은 사건이 살짝만 건드려도 고통이요, 자기 속에서 옛사람이 튀어나와서 ‘왜 나를 치느냐?’ 라고 하면서 늘 대립이다.
8절-9절: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안드레 역시도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았으니까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묻는 의도를 빨리 캐치를 했어야 하는데 빌립처럼 일반 세상개념에 머물러서 말을 하고 있다.
안드레가 한 아이에게 오병이어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어린아이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조물조물 할 때 주머니 속에 오병이어가 들어 있는 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아이의 몸에서 비린내가 나서 유심히 살펴보다가 아이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는지? 어쨌든 안드레가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다고 말을 한 것을 보면 자기 옆의 사람들이 뭘 가지고 있는지를 유심히 살펴본 듯하다.
안드레가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라고 말을 한 것은 ‘이 오병이어를 한 사람이 먹어도 모자랄 판인데 이 많은 사람의 누구 코에 붙이겠습니까?’ 이 말이다. 세상사람들의 계산법으로는 아주 타당한 말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말을 하는 판인데 온 세상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세상공부를 많이 한 사람에게 물어도 똑같은 대답이 나온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질적인 개념 속에 들어 있는 분이 아니다. 복음은, 당신의 말씀은 물질적 계산에 들어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예수 믿는 사람의 믿음이 물질적 계산에 잡혀 있다면 캄캄한 거다. 우리는 천국 계산법으로 물질을 다스릴 수 있는 머리를 열어야 한다. 하나의 예를 들면 무슨 장사를 시작할 때 ‘이 장사를 하게 되면 나의 신앙이 올라가겠느냐, 신앙을 팔아먹겠느냐?’ 하는 것을 먼저 생각을 해야 한다. 그리고 장사를 시작하고서 ‘우리 가게는 주일 날 문을 열면 다른 날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데’ 라는 생각에 붙잡히면 안 된다.
직장을 가질 때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최소한 주일은 지킬 수 있는 곳에 들어가야 한다. 조금 더 들어가서 신앙의 자유 시간을 많이 가지려면 사장을 예수 믿게 하면 된다. 그러려면 ‘이 환경 이 장소를 통해 구원을 잘 이루라고 하시나보다’ 라고 생각을 하면서 내 집 일처럼 일을 해야 한다.
빌립의 대답이나 안드레의 대답이나 어떤 계산에서 나온 거냐? 물질적인 계산에서 나온 육의 생각이다. 우리는 마음을 넓혀야 한다. 이런 물질적인 대답은 이백 데나리온이 아니라 이천 데나리온이라 할지라도, 이러면 제자들이 넉넉하게 생각할지라도 주님이 보시기에는 모자라는 생각들이다. 물질적인 생각으로는 아무리 크고 많다고 해도 주님의 생각을 따라잡지 못한다.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물질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주님의 법을 못 따라잡는다.
육의 생각은 수준적 차원이 신령한 생각을 못 따라잡는다. 그래서 빌립이나 안드레처럼 주님에게 ‘얼마의 돈이 있으면 해결을 할 수 있겠습니다’ 라고 해도 이것은 물질적 개념의 계산이라서 예수님의 영적인 생각에는 미치지 못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이런 걸 생각하면 교회에서 ‘부자가 되려면 십일조를 내고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라’ 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런데도 교인들이 이런 말에 사기를 당해서 스스로 갖다 준다.
육에 속한 말은, 육에 속한 생각은 그 어떤 것이라도 세상에 속한 말이요, 모자라는 말이다. 어떤 일을 하던, 직장을 가지던 ‘내가 이 일을 하면 돈을 많이 벌겠느냐? 지위가 올라가겠느냐?’ 하는 생각을 앞세우는 게 아니라 ‘이 일이 믿음생활에 도움이 되겠느냐? 이 일을 하다가 결국에는 세상에 정신도 빼앗기고 마음도 빼앗기지는 않을까?’ 하고 영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 세상에 속한 모든 말은 예수님의 천국복음의 계산법에는 어림도 없다.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린 어린아이는 자기도 배가 고픈데 무슨 마음으로 주님께 드렸을까? 참 기특하다. 어른이라면 구석에 숨어서 혼자 먹었으면 먹었지 선뜻 내놨을까? 아니면 내놓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현실을 생각해서 ‘이걸 내놓은들 어떻게 5천 명이 다 먹겠느냐?’ 라고 하면서 혼자 먹을 수도 있고, 아예 안 내놓을 수도 있는 거다. 우리도 그 때의 그 장소에서 오병이어를 가지고 있었다면 같은 마음일 거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는 사고의 발상이 예수님의 계산법과 같았다. 이 어린아이는 앞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아이다. 우리도 이 아이의 마음을 자기 속에 넣고 살아라.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