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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의 중요성을 가볍게 여기는 그리스도인들
문재인 정부 당시, 4성 장군의 부인이 갑질 행위로 지탄을 받았던 적이 있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매스컴은 전략적으로 그 부부를 매도하는 여론몰이를 했다. 어느 정도 불순한 음모와 계략이 보이기도 하지만 냉장고가 10대나 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성경의 마지막 책, 계시록에서 교회 시대에 보낸 편지가 있다. 일곱교회의 공통적인 사항은 ‘나는 네 행위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1. 에베소 교회 : 나는 네 행위를 알고 있다.(계2:2)
2. 서버나 교회 :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알고 있다.(계2:9)
3. 버가머 교회 : 나는 네가 어디에 사는지 잘 안다.(계2:13)
4. 두아디라 교회 : 나는 네 행위를 알고 있다.(계2:19)
5. 사데 교회 : 나는 네 행위를 알고 있다.(계3:1)
6. 빌라델비아 교회 : 나는 네 행위를 알고 있다.(계3:8)
7. 라오디게아 교회 : 나는 네 행위를 알고 있다.(계3:15)
현대교회가 포스트모더니즘에 편승한 기조들 중의 하나는 행위신앙에 대한 광범위한 거부감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수없이 보는 패턴은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징계가 계속 반복된 사실이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기대와 명령에 반역한 결과였다. 교회의 현대화와 도시화는 복음주의 교회가 세속화된 것이다. 한국교회의 초기만 해도 그리스도인의 행실은 세상에서 칭찬을 받았으나 지금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거룩하신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의 세상을 포용한 결과다. 신약성경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 서로 경쟁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이런 구도는 점점 약해졌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오로지 하나님께 성실하라는 요구를 담고 있다.
이것은 십계명의 첫 대목에 명확히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계명에 대한 확고한 지침은 믿음과 율법에서 양자택일하는 구도에서 점점 모호해지고 퇴색되었다. 행위의 중요성은 점점 간과되었고 신자들은 도덕적 타락의 수준에서 세상과 성별되지 못하게 되었다.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바울의 사상이 교회의 유일한 교리가 되었다. 양이나 염소의 피를 통한 죄사함이나 제사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대체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율법은 수백가지 조항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율법을 버리면서 십계명이나 율법의 정의와 공의의 개념도 함께 버리고 말았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된 사복음서 어디에서도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 산상수훈(마 5-7장)은 적극적인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간디는 기독교인들이 이대로만 산다면 온 세상이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 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게 하라.(마5:16)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다.(마5:17-18)
누구든지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마5:19)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좋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5:20)
예수님께서 선한 행위를 강조하신 말씀을 보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십자가 이전과 이후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십자가 이전은 율법 시대, 이후는 은혜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이 세례요한까지라고 선을 그으셨다. 또한 계시록에서도 선한 행위에 대한 중요성은 멈추지 않는다.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네 행위를 알고 있다’며 회개를 촉구한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로 세마포를 준비해야 하며(계19:8),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계20: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왜 교회가 이토록 행위를 혐오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믿음과 행위를 하나로 보지 않고 믿음만 강조한 이유도 있는데 이는 개신교의 뿌리인 마틴 루터의 영향이기도 하다. 바울이 믿음을 강조한 시대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 마치 행위는 다 필요없고 믿음만이 유일한 것처럼 잘못 해석하였는데 인간 본성이 타락한 행위로 이어지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바울의 신학을 더 중시하는 교리로 지배당했다. 물론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나 믿음을 앞설 수는 없다. 문제는 행위 자체를 마치 율법혐오로 몰아간 것인데 이는 예수님의 말씀에 완전히 반하는 행동이었다. 믿음의 고백은 법적 선언이지 의로운 성품이 주입되어 의롭게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고백은 한 시점이고 거룩한 삶은 평생이다. 행위를 경박하게 대하는 것은 마치 대학에 합격한 날부터 공부하지 않는 것과 같다.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면(以信得義) 행위로써 상을 얻는다.(以實得償)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믿음이 없음으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된 행위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의 행위들이 기록된 여러권의 책들이 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계20:12)
제발 그리스도인들이여,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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