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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사람의 북쪽 사역
열왕기상 13:1~10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소집한 보름스 의회는 마틴 루터에게 그동안 교회에 대하여 행한 발언들을 취소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던 루터는 의회 참석을 고민했습니다. 주변에서는 극구 만류했습니다. 꼭 100년 전 보헤미아의 개혁자 후스가 화형에 처하였듯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14일을 걸어 보름스 의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루터의 배후에는 작센의 영주이며 선제후인 프리드리히를 비롯해 칼 슈타트와 멜란히톤 교수, 그리고 루터를 지지하는 학생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만일 그런 동지가 없었다면 루터의 개혁 의지는 찻잔의 태풍에 불과했을지도 모릅니다.
루터는 당시 교회의 왜곡된 가르침과 교회 권력을 일삼는 자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제 양심과 성경에서 직접 가르쳐주지 않는 한 저는 저의 생각과 발언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 결국 1521년 5월 25일 보름스 의회는 루터를 정죄하고 법외 인간이 되게 하였습니다. 법외 인간이란 더 이상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법에 호소할 수 없는 상태, 사람의 기본권이 무시되어도 호소할 곳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북한이 고난의 행군이 한창일 때 목숨을 걸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몰래 들어온 북한 동포들이 이런 경우입니다. 현지인들로부터 임금을 떼이거나 인신매매 등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법체류 노동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법외 인간이 되어 비텐베르크로 돌아오는 루터는 복면의 괴한들에게 납치되었습니다. 이는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루터를 보호하기 위한 위장 납치인데 그 결과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성에 피신하여 <독일어 성경>을 번역할 수 있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예정론을 다룰 때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를 배웁니다. 선택이란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 가운데 자신의 주권에 의해 어떤 사람을 뽑았다는 것이고, 유기란 어떤 사람을 죄악 중에 내버려 두셨다는 뜻입니다. 국어사전에서 ‘유기’란 ‘보호할 사람이 보호받을 사람을 보호하지 않는 상태로 두는 일’을 말합니다. 무슨 악한 일을 하든 내버려 둔다면 버린 자식이 분명합니다. 못된 자식이라도 자녀를 사랑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돌이키려고 노력하기 마련입니다. 책망과 징계가 있다는 사실은 사랑과 관심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로보암이 베델에 만든 제단에서 제사할 때에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베델 제단에 대한 심판을 예언합니다. “제단아, 제단아, 나 주가 말한다. 다윗의 가문에서 한 아들이 태어난다. 그 이름은 요시야다. 그가 너의 위에 분향하는 산당의 제사장들을 너의 위에서 죽여서 제물로 바칠 것이며, 또 그가 너의 위에서 그 제사장들의 뼈를 태울 것이다”(13:2). 이는 아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이 여전함에 대한 반증입니다. 자신과 다르다고 함부로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을 읽으며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1)이 유독 눈길을 끕니다.북 왕국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없어서 굳이 남쪽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와야 했을까요? 역대하 11:13~16에 의하면 여로보암에 의해 파직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유다로 피난을 갔습니다. 이는 우리 민족의 경우와도 유사합니다. 북한의 피난성도 덕분에 남한교회가 부흥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증오도 격동시켰고 복음을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게 했습니다. 지금 남한교회는 북한을 위한 부름에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직도 당신들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민족의 평화와 일치를 원하신다고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가 그 반대를 외치고 있어 속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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