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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사명자
열왕기상 13:20~34
본문을 한번 읽고, 다시 읽고, 또 다른 번역본으로 읽기를 반복합니다. 성경에 왜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었을까 궁금하고 의아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실족하게 한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람 이야기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은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은 서로의 모자람을 채워주고 약점을 보완하는 하나님 사람들의 아름다운 관계 대신 상대를 속여 골탕 먹이게 하는, 불편한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을까요? 유다에서 온 예언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과제는 베델의 제단에서 구원의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치환하여 제사하는 여로보암의 악을 징벌하고자 함이 아니던가요? 유다에서 온 예언자가 그 일을 잘 수행하고 제 곳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본질과 상관없어 보이는 일이 과연 생명을 빼앗을 정도의 과오인가요?
다시 나귀를 타고 유다로 발길을 돌리는 하나님 사람의 마음이 천근만근입니다. ‘어쩌자고 내가 베델의 노인 말을 들었단 말인가? 내 잘못이야. 그러지 말았어야 해. 아이구,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성경에 없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부끄러움과 후회의 걸음을 내딛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사자가 그를 물어 죽였습니다. “그 주검은 길가에 버려 두었으며, 나귀와 사자는 그 주검 옆에 서 있었다”(13:24). 사자는 배가 고팠던 게 아닙니다. 사자가 나귀를 그대로 둔 장면도 이를 입증합니다. 이 정지된 그림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통해 오늘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
문득 죽어 마땅한 여로보암 대신 유다의 예언자가 죽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칩니다. 아, 생각이 이에 미치면서 저는 전율을 느낍니다.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주인공이 아닙니다. 베델의 노인 예언자도 단역 배우에 불과합니다. 주인공은 여로보암이라고 생각하니 알 수 없는 자괴감에 빠집니다. 본문의 앞뒤 맥락은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악행을 저질렀다는 내용입니다(13:1, 33).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을 깨우치기 위하여 이런 연극을 준비하셨습니다. 아, 하나님의 사람은 존중받고 대접받는 존귀한 존재가 아니라 일회용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습니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니 자괴감이 들어 우울하면서도 하나님 사람의 본분에 대하여 깨달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런 일이 생긴 뒤에도, 여로보암은 여전히 그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아니하고, 오히려 일반 백성 가운데서,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산당의 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13:33). 유다에서 온 예언자의 슬픈 죽음을 여로보암이 인지하고 있음을 전제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런데도 깨달음이 없습니다. 죽어 마땅한 자는 살리시고, 죽지 않아도 될 이를 죽여 당신의 뜻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여전히 몰이해합니다. 이는 여로보암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반역하는 이들이 다 그렇습니다.
여러보암의 죄 가운데 하나는 일반 백성을 제사장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에게만 죄가 있지 않습니다. 일반 백성에게도 죄가 있습니다. 일반 백성으로서 제사장직 수행을 자원하는 이들은 자신이 제사장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제사장직을 자원하였다는 점은 하나님을 거역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입니다. 오늘 이 땅에도 하나님 사람을 자처하는 이들이 무수합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는 있지만 아무나 나서는 일은 삼가야 합니다.
하나님, 사명자의 본분을 잊고 존귀와 높임을 추구하는 교만함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할 일을 다하고도 책망 듣고 죽임당할 수 있는 신분임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더 낮아지고 겸손하기를 힘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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