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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끝
열왕기상 15:25~32
“그런데 쿠마의 시빌이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걸 난 정말 내 눈으로 보았어. 그녀에게 애들이 ‘시빌, 뭘 하고 싶으세요?’하고 조롱하니까, 그녀는 ‘난 죽고 싶어’하고 대답했어.” 영국 시인 T. S. 엘리엇(1888~1965)의 시 <황무지>의 첫 문장입니다. 이 시는 1922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상이 자본주의의 질서에 몰입하는 과정에 발표된 시입니다. 시인은 부활과 예찬의 계절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지칭합니다.
무녀 시빌이 살던 쿠마에는 나폴리 근처였습니다. 당시 나폴리는 그리스의 식민지였습니다. 시빌은 매우 영험한 무녀로서 아폴론의 눈에 들어 ‘한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시빌은 한 줌의 모래를 쥐고 ‘모래알의 숫자만큼 생일을 맞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시빌은 장수를 요구하였지만 겸하여 청춘도 구했어야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시빌은 죽지 않았습니다. 몸이 작아질 뿐입니다. 결국 목소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시빌에게 축복은 가장 견디기 어려운 저주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빌은 영생을 소망하는 인간의 통렬한 자화상입니다. 영생과 번영을 꿈꾸는 인간은 동시에 죽음과 절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양자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한 욕망을 끝없이 되풀이할 뿐입니다.
모든 인생은 누구나 죽음을 향해 갑니다. 증오와 전쟁을 부추겨 죽음을 극단의 절망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사랑과 평화를 실현하므로 죽음을 희망으로 수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시빌의 처지가 되면 죽음을 소망하기 마련입니다. 삶이 죽음보다 못할 때 죽음은 축복입니다. 죄와 악이 점철될 때 끝이 있다는 사실은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다행한 일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 시대 우리 사회에서 이를 깨달아야 할 악인들은 아직 징그러운 자기 내면을 보지 못한채 피곤한 삶을 축복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끝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욕망하며 질주하느라 재미가 좋습니다. 그들이 한숨을 쉬며 죽음을 재촉할 때 비로서 희망은 가까이 다가옵니다.
유다 아사 왕 2년에 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년도 되지 않아 바아사가 반역을 일으켜 나답을 죽이고 왕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바아사는 왕이 되자, 여로보암 가문을 (중략) 모두 전멸시켰다. 주님께서 실로 사람인, 주님의 종 아히야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여로보암이 자기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까지도 죄를 짓게 하였으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진노하셨다”(15:29~30). 악한 지도자는 자기만 죄를 짓는 게 아니라 백성까지 죄악에 빠지게 합니다. 이 사실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예와 권력을 탐하고 주색을 좋아하며 미신을 신봉하는 오만불손한 지도자는 세상을 어지럽히기 마련입니다. 성경은 그런 자의 결말이 비참했다고 설명합니다. “바아사는 왕이 되자, 여로보암 가문을 쳤는데, 숨 쉬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전멸시켰다”(15:29a). 악인에게 비참한 종말이 있다는 사실은 다행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신뢰하게 합니다. 오늘 이 땅에서도 악한 자가 비참한 종말에 이르므로 사필귀정하기를 바랍니다.
“평화, 평화, 평화” <황무지>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평화는 언제 누구에게서 오나요? 이 답을 아는 이들은 아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그릇된 욕망을 탐하고, 그릇된 명예와 권력을 숭배하는 이들이 지금 이 땅에도 존재합니다. 그들은 오직 악을 수행하기 위하여 태어난 존재처럼 안하무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끝을 주십시오. 세상에 희망과 평화를 이어주십시오.
2023. 10. 1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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