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열둘
열왕기상 18:30~46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우상을 숭배하는 850명 예언자들과 참신을 가리는 전무후무한 일이 갈멜산에서 벌어졌습니다. 아합 왕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도 이 희세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먼저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숭배하는 예언자들이 자기들의 신을 부르며 열광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응답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무엇보다 먼저 무너진 하나님의 제단을 고치기 위하여 열두 돌을 취하여 쌓았습니다. “엘리야는, 일찍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고쳐 주신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 수대로, 열두 개의 돌을 모았다.”(18:31) 구태여 열두 돌을 취한 일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아, 그러니까 엘리야는 야곱의 열두 아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염두에 두고 돌들을 취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지금 제단을 쌓은 곳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갈멜산입니다. 이스라엘은 열 지파로 구성된 국가입니다. 열 개의 돌을 택하였어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현실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상의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비록 민족은 나뉘어져 두 나라가 되었지만, 엘리야는 분열되기 이전의 상태, 그리고 미래에 반드시 와야 할 분열 그다음의 세상을 이스라엘의 본질과 모범으로 보았습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을 숫자로 치환하여 성경을 해석하는 게마트리아에 의하면 열둘은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하는 수입니다. 지금 악한 왕 아합과 요사스러운 이세벨에 의하여 민족과 나라의 정체성이 크게 훼손되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것이라는 믿음의 표현이며, 나누어진 채 서로 싸우기에만 몰두하는 남 왕국과 북 왕국을 책망한 메시지입니다.
현실을 살아내기 버거울 때일수록 이상을 잃기 쉽습니다. 본질을 망각하고 현상에 매몰되기 쉽습니다. 현실주의자의 생각이 무조건 다 틀린 것은 아니더라도 이상을 잃어버리면 삶은 더 망막해지고 희망은 멀어집니다. 우리 민족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1945년에 일제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진정한 해방은 아직 미완료 시제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가 긋지 않은 선이 민족과 땅을 갈랐습니다. 슬픈 전쟁을 치르며 깊은 상처를 주고받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우리는 서로를 견원시 하며 이념을 이유로 증오와 대결을 획책하고 있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가 더딘 것은 상대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반평화 의식을 가진 이들이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평화의 첨병이 되어야 할 교회조차도 이념 앞에서는 힘을 잃으므로 스스로 복음을 무력화시키고 있습니다. 평화와 일치는 상대가 변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평화와 일치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누가 아프면 아픈 사람 중심으로 가정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힘센 자가 중심이 아니라 약하고 아픈 자가 중심입니다. 사회와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많고 권력 있는 자가 행복해하는 사회가 좋은 세상이 아니라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일용직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가 행복해야 좋은 세상입니다. 열 지파가 중심이 아닙니다. 두 지파가 채워지지 않고는 완성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과반수 찬성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저는 부자가 행복한 세상을 꿈꾸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행복한 세상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가난하고 힘이 없어 성공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기도합니다. 아래층의 일용직 노동자인 아저씨가 일거리를 잃어도 절망하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2023. 10. 20 금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