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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열왕기상 20:35~43
우리말에 ‘황소가 뒷걸음치다가 쥐를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어쩌다가 우연히 호재로 이어지는 경우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자기 의도보다 더 잘될 때 착각합니다. 평소에 공부를 성실하게 하지 않은 학생이 의외로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 자신이 꽤 우수한 학생인 줄 착각합니다. 변변찮은 프로야구선수가 어쩌다 홈런을 쳤을 때 자기가 대단한 스타인 줄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아예 그렇게 믿습니다. 아합왕이 그런 경우입니다. 이스라엘과 시리아는 비교가 되지 않는 국력 차이가 있었습니다. 시리아가 월등히 센 나라입니다. 그런데 두 번의 전쟁에서 특별한 이유 없이도(물론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지만) 이스라엘이 크게 이기자 아합왕은 자신감과 만용에 빠져들었습니다. 자신이 정말 대단한 군주인 줄 착각한 것입니다. 이때야말로 겸손해야 하고, 이런 승리에 이르게 한 이유를 찬찬히 찾아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아합왕은 득의한 듯 방자하게 행동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며 하나님을 반역한 악한 왕 아합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에도 예언자학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합니다. “예언자의 무리 가운데서 어떤 예언자”(20:35)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가 속한 예언자 무리란 어떤 공동체였을까요? 하나님의 의로운 종들을 죽이고 배척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사람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을 영적 공백 상태라고 속단해서는 안 됩니다. 여로보암 시대에도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하나님의 사람 가운데에는 유다에서 온 예언자가 있었습니다(13:1, 21). 악한 왕 아합시대에도 디셉 사람 엘리야도 있었고(17:1),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가 있었습니다(20:1).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한 희망은 있습니다. 악이 횡행해서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예언자가 없는 시대가 절망의 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한반도를 생각합니다. 남녘에는 너무 많은 교회와 그보다 더 많은 목사와 그보다 더 많은 교인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목사와 교인과 교회의 수가 희망과 연동하는지 의문입니다. 이 땅에 예언자들이 있다면 우리 사회가 이 정도 모습일까를 생각하며 반성합니다. 과연 이 땅에 희망은 있습니까?
반면 북녘에는 목사도 드물고 교회도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다입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정확히 가늠할 수 없지만 10~15명으로 구성된 가정교회가 500여 개소 있다고 합니다. 가정교회는 장로와 집사가 중심이 되어 가정예배소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봉수교회와 칠골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전통적 한국교회의 설교와 다르지 않습니다. 복음에 담긴 윤리적 교훈이 주를 이루고 민족 중심의 보수적 설교입니다. 북한 사회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이런 신앙공동체가 유지된다는 점은 고무적입니다. 북한의 목회자 양성에 대한 과정이 알려져 있지 않아 궁금하지만, 한반도의 미래 희망을 품는 ‘예언자의 무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과 기도가 있습니다. 저는 북녘을 영적 진공상태로 보지 않습니다. 북한은 영적 불모지가 아니라 아직 희망의 싹이 트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국제적 고립과 경제적 가난에 시달리고는 있지만 그 환경에서 백성에게 꿈과 용기를 주는 예언자가 존재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저희는 불순물이 너무 많이 섞여 정화되어야 하고, 북한 교회는 고난을 벗어나 부흥하여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민족 희망의 근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악한 왕 아합 치하에도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있었듯 북녘에도 의로운 이들을 일으켜 주시고, 맘몬 숭배가 이루어지는 남녘에도 희망의 예언자 무리를 보게 하여 주십시오.
2023. 10. 2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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