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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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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토요 교역자 대상 신학 및 성경공부 |
◆ 삼상:에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데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중에 좋은 것을 강압적으로 빼앗아서 자기 것으로 삼는 등의 악한 짓을 하면서 전쟁에서 이기게 해달라고 법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나갔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었다.
이게 남 얘기가 아니라 자기 속에도 이런 속성이 들어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게 아니라 먼저 자기 것으로 취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자기 속에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엘리의 두 아들이 들어있는 거다.
이런 자들이 이스라엘의 전쟁에 대표로 나가면 그 전쟁에서 이기겠느냐, 지겠느냐? 진다. 왜냐?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거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이기는 것이니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자기가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자기 욕심을 그대로 가진 채 전쟁터에 법궤를 들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줄 것으로 믿고 법궤를 앞세워서 전쟁터에 나갔다가 죽고 말았다. 이게 뭐냐? 오늘날 교인들이 성경을 앞세워서 나가면 이긴다고 한다거나 ‘믿사오니’ 하고 나가면 복을 받는다고 하는 정신을 말한다.
전쟁터에서 법궤도 빼앗기고 두 아들도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는 나이도 많고 몸이 비둔해서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사람의 몸이 비대하면 땅에 쉽게 앉지 못한다. 신앙 사상적으로도 육의 생각으로 비대한 사람은 땅에 제대로 못 앉는다.
이 전쟁으로 블레셋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서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렀고, 하나님의 궤를 다곤 당의 다곤 곁에 두었는데 다곤이 넘어지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서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다. 그리고 독종이 발해서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망하게 하니 아스돗 사람들이 법궤를 가드로 옮겼고, 가드로 옮겨간 후에 그곳에 더 큰 독종이 발해서 성읍 사람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쳤다.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 에그론 사람들이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블레셋 사방으로 보내서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의 죽음을 면케 하자’라고 했다.
블레셋에 법궤가 필요하냐?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법궤가 오히려 재앙이다. 블레셋이 어떤 족속이냐? ‘블레셋’ 하면 이스라엘을 업신여기고 자기 수하에 두려고 한 골리앗의 사상을 생각해야 한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덩어리 크고 숫자 많고 돈 많은 것을 알아주고, 이런 게 별로 없는 사람을 무시하는 신앙도 아닌 블레셋 정신을 가진 목사는 블레셋의 대표적인 장군인 골리앗이다. 이런 정신을 가진 자들에게는 법궤가 필요 없다. 이런 성격의 목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 없다. 이걸 알아야 한다.
블레셋 사람들이 일곱 달이 지나서 속건제를 드리고 법궤를 본처로 보내기로 하고 새 수레를 만들어서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만들어서 법궤와 함께 새 수레에 태우고 젖 나는 소 둘로 수레를 끌게 하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법궤가 그 본 지경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라고 했다.
여호와의 궤와 및 금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싣고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는데 암소가 새끼를 생각하며 울기만 할 뿐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벧세메스까지 갔다. 수레가 벧세메스에 도착하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본 고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쳐서 (오만)칠십 인이 죽었다.
이게 무엇을 말해주느냐? 죄인은 하나님을 못 본다는 거다. 죄 된 마음으로는 성경을 못 본다는 거다. 성경은 성령에 감화 감동된 의인이라야 보는 거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백성에게 필요한 거지 말씀이 필요 없이 사는 교인이나 목회자는 다 블레셋의 정신으로 살기 때문에 성경이 필요 없다.
사람이 성경을 보면 자기가 자꾸 죽고 자기 속의 의인이 살아나야 하는데 옛사람 주격으로 사는 사람은 성경이 자기를 욕하는 것 같고 자기를 저주하는 것으로 들리기 때문에 성경을 닫아버린다. 진리이치로 말을 하면 육 주격으로 된 목사는 말씀 앞에 자기가 안 죽으려고 한다. 그러니 옛사람이 죽고 의인으로 살아나오지 못한다.
신앙의 원리가 빼앗긴 법궤를 찾아오려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스라엘 지도자가 가서 찾아와야 한다. 그런데 짐승이 찾아왔다. 물론 블레셋에서 암소가 끄는 수레에 법궤를 실어서 이스라엘로 보낸 거지만 신앙적으로 보면 짐승이 법궤를 찾아온 거다. 오늘날 목사가 성경을 세상정신으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성이, 진리의 기준성이 블레셋이라고 하는 세상에 빼앗겼다. 정신적 사상적으로 세상에 빼앗긴 이 법궤를 누가 찾아오겠느냐?
암소 두 마리가 법궤를 싣고 왔는데, 이 암소에다 자기의 마음을 넣어서 생각해보면 암소 두 마리가 수레에 법궤를 싣고 새끼가 있는 쪽으로 갔느냐, 아니면 어미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새끼의 울부짖음을 뒤로 하고 벧세메스로 갔느냐? 벧세메스로 갔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는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데 무엇이 뒤에서 붙잡느냐? 아내가 우느냐, 자식이 우느냐, 직장이 우느냐? 자기의 삶 가운데서 가치판단 평가성을 바로 내려야 한다. 이런 게 계시의 사상으로 나오는 거다.
법궤를 실은 수레가 벧세메스의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자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각을 떠서 번제로 여호와께 드렸는데, 이것은 믿는 사람 중에 특히 교회 인도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헌신을 말해주는 거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헌신했다면 자기의 몸과 정신을 모두 각을 떠서 주님께 드린 것이니 자기의 자아가 다 죽어야 하는데 누가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면 자기 속에서 옛사람이 튀어나와서 부르르 떤다면 이게 죽은 거냐, 산 거냐?
우리의 마음을 그려놓은 게 성경에 있다. 모세가 누구에게 가서 이스라엘을 내어놓으라고 했느냐? 다른 말로 하면 회개하라는 말도 된다. 애굽의 바로 왕이다. 그런데 바로 왕은 못 내놓겠다고 했다. 이건 하나님과 대립이다. 그래서 모세가 바로 왕에게 이스라엘을 안 내어놓으면 애굽이 당할 재앙을 여러 차례 말했는데, 이것을 우리의 신앙으로 말하면 ‘그 성격 성질을 안 고치면 내일 또 무슨 재앙이 온다. 무슨 재앙이 온다’라는 거다.
우리 목사님들의 교회나 가정이나 주위에서 여러 가지 사건 환경이 오고 가는데, 이런 것들은 계시적으로 보면 모세가 애굽의 왕을 지적한 것처럼 세상을 붙잡고 있는 자기의 잘못을 하나님께서 지적하는 것이니 ‘이건 내 책임이구나’ 해야 하겠는데 그러지 않고 이스라엘을 붙잡고 종으로 부려 먹으려고 하는 바로 왕처럼 자기의 잘못을 고치지 않는 거다. 이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듣는 거다. 이런 사람은 모세가 바로 왕의 잘못을 지적하니 고치는 대신 더욱더 죄를 짓는 쪽으로 나간 것과 같은 것이라서 하나님의 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
내가 여기 오신 목사님들에게 지적할 때는 나만 아니라 환경이 목사인 자기를 증거하고, 자기의 실력이 증거하고, 자기의 정신이 증거하는 건데도 이 양심의 소리는 안 들리고 자기 체면을 깎는 소리로 듣는 목사를 많이 봤다. 카멜레온처럼 주위의 상황에 따라 교훈이 달라지는 목사도 많이 있다. 여기에 나왔으면 말씀을 깨닫고 자기를 고쳐야지 여기에서 받은 교훈을 다른 사람에게 써먹겠다고 하는 정신은 안 된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자기가 보여야 은혜가 되고 회개가 되는 거지 자기는 안 보이고 ‘그동안 듣지 못하던 새로운 교훈이구나’ 하고 그친다면 심판을 각오하라.
모세가 바로 왕 앞에서 지팡이를 마음대로 쓰려면 전제되어야 할 게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모세가 호렙산에 이르매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서 사라지지 않았고, 이에 모세가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라고 하자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불러서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라고 하셨다.
신을 벗으라는 것은 네 자율적 주관적으로 움직이는 정신을 먼저 벗으라는 거다. 모세가 이걸 벗어버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안 보냈는데 인간이 하나님이 자기를 보냈다고 한다면 거짓 종이다. 자기의 주관적인 옛사람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면 세상운동을 하면 했지 이스라엘의 해방운동이 안 나온다.
주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는데, 이 안에는 ‘오늘날 교회가 무엇을 먼저 붙잡았느냐? 세상의 그 무엇보다 진리를 먼저 붙잡았느냐?’ 하는 것을 알게 하는 게 들어있다.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아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려면 먼저 자기 속이 주님의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자기 속이 옛사람 그대로 되어있으면 어떻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겠느냐?
어부인 주님의 제자들은 산 고기를 잡아서 죽이는 운동을 하다가 주님을 만나서 생명의 교훈을 받고 사람이 바뀌면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운동을 하게 되었다. 주의 일을 한다면서 여전히 옛사람 주격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 꾀대로 그물을 짜서 산 고기를 잡아서 죽이는 운동을 하게 된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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