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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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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21장 1절-6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1절-4절: 진리와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 덕을 세우지 않고 문제만 일으키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형벌의 손에 빠져들고 있음을 알아라.
부자의 헌금은 풍부한 가운데서 조금만 해도 그 액수가 과부보다는 훨씬 많다. 부자가 마음대로 쓰고 남은 찌꺼기로 헌금을 해도 과부의 헌금보다 훨씬 많다. 많은 교인들이 이 부자의 헌금을 보고 믿음이 크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마음을 알고 계신다. 그래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즉 로마화폐의 지극히 작은 단위인 두 렙돈을 헌금을 했는데 예수님은 이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하면서 가난한 과부가 자기의 전 재산을 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과부의 전 재산이 두 렙돈뿐이었을까? 집도 가구도 없었을까? 과부가 워낙 가난해서 돈이 두 렙돈뿐었다면 다른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옳게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 과부는 자기의 전 재산을 바쳤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돈 이전에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을 더 말하는 게 아닌가? 말하자면 ‘내일은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그 마음이 없이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에서 드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이 과부가 자기의 전부를 바쳤다고 하신 것이 아닌지?
부자는 헌금을 해도 그 마음이 자랑하는 마음으로 한 것으로 보이고, 가난한 과부는 감사한 마음으로 헌금을 한 것으로 보인다. 부자는 다 쓰고 남은 찌꺼기로 했고, 가난한 과부는 하나님께 드릴 것부터 먼저 챙겨놓고 한 것으로 보인다.
‘첫 열매를 바치라’고 했는데 농사를 해서 처음에 난 열매를 말하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에서 하나님께 하고 싶은 그 첫 마음이 그 사람에게 있어서 첫 열매다. 그 마음을 끄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마음속에 하나님의 성령의 열매가 열린 게 없이 여러 감사 절기를 지키는 게 많다. 이건 의미가 없다. 그러니까 하나의 종교의 절기로 지내고 있다. 절기를 지키는 그 자체가 나쁘다기보다도 마음속에 열매가 열리지 않는 게 문제다.
성경에 왜 그런 절기를 기념하라고 했느냐? 마음속에 성령의 열매가 맺혀야 한다는 걸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인데 그건 없이 절기로만 지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옳은 게 아니다. 중심을 보시는 그 분이니까.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이 그 분에게 드려지는 삶이어야 한다. 왜? 우리의 신앙사상이 하나님이 온전에 붙어있게 때문에. ‘너희들은 일어서든지 눕던지 앉든지 무엇을 하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는 의미가 하나님의 온전으로 만들어지라는 것이다. 사람이 안 만들어지면 절기를 아무리 지켜도 이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절기를 지키면서 먹고 마시는 그 쪽으로 자꾸 들어가기 때문에 그건 아니다.
계시적으로 육적 이스라엘을 등용시켜서 우리에게 이런 깨달음 주려고 절기를 지키라고 하신 것인데 오늘날 교회에서 그 절기를 지키는 게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성령의 열매로 들어가 있느냐? 없다. 그러니까 표면적 종교적 절기적 행사로만 지키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 당시 때는 그런 절기의 행사가 안 행해졌느냐? 행해졌는데 예수님과 같은 속성적 열매가 없다. 그러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예수를 죽이는 교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죽이고 심판을 받았다.
‘자기 속에서 먼저 뭘 생각하느냐’ 하는 그게 자기의 첫 열매다. 그리고 자기 속에서 사상적으로 여물어진 것이 자기 생각으로 나타나는 건데 그게 자기의 열매다. 효자 효녀들을 보면 맛있는 게 있으면 먼저 부모님을 생각을 한다. 그 마음에 의해서 효행이 나오는 거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자타의 구원을 생각한다면 그게 성령의 열매다. 그걸 지키라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감사를 하라는 것이다.
가난한 과부는 하나님께 드릴 것부터 먼저 챙겨놓았다. 그런 것처럼 인인관계 속에서도 먼저 남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자타의 이룰구원이 있으니 자기의 구원이 타에게 들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거다.
다른 사람을 살리려면 먼저 자기 사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자기 사는 것을 모르고 남을 살리려고 하다보면 남을 죽이는 경우도 있다. 신앙의 눈으로 봐도 그런 게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하는 것은 ‘먼저 너부터’ 라는 의미가 있는 거다. 그 이치를 잘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치를 간단히 말하면 잠자는 사람을 깨우려면 자기부터 먼저 일어나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자기부터 바로 서야 다른 사람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거다. 자기도 못 선 주제에 다른 사람을 못 세운다.
또 그 원리가 어린아이를 키우려면 아버지가 돼야 키울 수 있다. 어린아이를 키우려면 모든 면에 경험하고 성장하고 먹이고 입히고 이게 돼야 한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아버지가 되겠다고 한다면 이게 되는 거냐? 그 원리가 안 되는 거다. 기독교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영적 이치는 그대로 들어가는 거다.
평소에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하고 싶은 마음이 항상 두 렙돈만 내려고 했을까, 아니면 더 있으면 더 내고픈 마음일까? 후자다. ‘항상’ 이게 중요하다.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냈다고 했으니 그 다음날부터 굶어죽지 않았을까?
예수 믿는 사람의 가정이 여러 가지 유형이 있는데, 온 가족이 복음위주로 사는 가정이 있다. 이건 믿음의 가정이다. 시간이나 헌금이나 활동이나 등등이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복음위주로 사는 가정이 있고, 또 어떤 가정은 한 집안에서도 식구들 각자가 자기가 번 것은 자기가 쓰고, 자기가 모으고, 그리고 자기 것을 따지기를 잘 하는 가정이 있다. 이건 앞에서 말한 것과는 정 반대가 된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봉사심도 없고, 사랑도 없고, 인간미도 없고, 이기적인 세상 물질욕심이 다분히 들어있다. 그러니 사람이 참 불쌍하다. 마음이 쪼그라져 있다. 은혜 받는 마음이 아니구나.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걸 너는 못 받겠구나.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꾸 상대의 나쁜 것만 생각하는 것은 병이다. 상대방이 회개했을지도 모르는데 자꾸 남의 나쁜 것만 생각하는 것은 병이다. 털어내기도 하고, 성경대로 용서할 줄도 알고, 대화도 자연스럽게 해야 한다.
아이들이 노는 걸 보면 자기들끼리 싸워서 원수가 된 것 같으나 얼마 안 가서 친해지고, 또 싸우고 원수 됐다가 또 친해지고 한다. 그걸 보면 ‘저게 크는 거로구나. 그렇게 하면서 마음이 다듬어지고, 생각도 하게 되고, 저게 크는 거구나’ 하게 된다. 그런데 한 번 싸웠다고 해서 영영히 헤어진다면 모든 사람과도 그럴 것이니 그러면 어떻게 할 거냐? 사람 가운데서 살겠느냐? 못 산다. 그런 사람은 이기성이다. 너는 혼자 살아야 되겠구나. 그러면 세상이 혼자서 살아지는 거냐?
사람은 포괄성을 가져야 한다. 타가 좀 잘못했다고 할지라도 진리정신을 가지고 용서가 들어가야 한다. 상대가 잘못된 것은 영원 궁극적인 것이 아니고 방편이라면 방편인데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느냐? 용서가 들어가고 즐겁게 대화가 되고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좁아진 게 자기에게 병이 돼 버리고, 은혜도 못 받고, 펴지지를 못하고 오그라진다.
예수님을 보면 여러모로 모자란 제자들에게 그런 정신으로 교훈을 하고 계시는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하나 다 똑같은 게 아니다. 별별스러운 제자들이 다 있다. 가룟유다는 대표적이지만 사실 가룟유다와 같은 우리들이 아니냐?
육신적으로 조금 잘못된 것은 꼭 영원 궁극적으로도 그런 게 아니다. 그럼에도 상대가 좀 잘못됐다고 해서 나도 그 상대와 똑같이 그를 대해서 나의 궁극적인 면에 손해를 보면 되겠느냐? 그러니 내 쪽에서 품어야 한다. 그러면 그걸 품는다고 해서 진리정신을 버리는 거냐? 그건 아니다. 진리정신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상황에 따라서, 때에 따라서, 존재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사건에 따라서 그 대함이 달라지는 것뿐이다.
그런데 우리의 인식 습관 버릇이 자꾸 남의 잘못을 잡고 늘어지길 잘 하는데 이건 잘못된 마음이니 풀어야 한다. 안 풀면 자기 병이 된다. 이러면 다른 사람들이 그런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러면 내 마음이 나빠지고, 마음이 나빠지면 외톨이가 되고, 외톨이가 되면 자기가 섭섭하다. 자기에게 좋은 건 하나도 없다. 은혜를 못 받는다. 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를 못 해 줬기 때문에 하나님도 ‘너는 더 큰 은혜를 받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남을 용서해 주지 못하느냐’ 하고 은혜를 줄 수가 없는 거다. 받는 그릇이 안 되는 거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서 불쌍한 사람이 참 많다. 돈 없고 가난한 게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쪼그라져 있으니 불쌍하다. 깨닫지 못한 사람이 참 불쌍한 거다.
과부가 자기의 전부를 바쳤다는 게 어떻게 바친 것을 말하느냐? 집까지 다 바쳤다는 말이냐?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했는데 두 렙돈밖에 안 바쳤는데? 아주 최하 단위의 돈 하나를 넣었는데 왜 이렇게 말씀을 하시느냐? 돈 자체를 두고 하는 말씀은 아니다. 그러면 다른 부자들은 두 렙돈도 안 넣은 것이냐? 아니다. 그럼에도 과부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하는 것은 그의 마음을 보고 하는 말씀이다.
그러면 그 마음이 뭘까? 돈 이전에 먼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이다. 과부에게는 그 중심이 들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중심이 들어있는 이 과부에게는 두 렙돈만이 아니라 감사한 마음에서 ‘얼마든지’ 하는 마음의 풍부성이 그 안에 들어있다. 그러니까 있으면 있는 대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과부의 마음의 풍부성을 말한다.
부자들은 돈이 많아서 두 렙돈이 큰돈이 아니지만 이 과부에게 있어서는 두 렙돈은 굉장히 큰돈이다. 그래서 부자들의 걱정과 가난한 사람의 걱정은 다르다. 부자들의 걱정은 백화점을 못 가면 큰 걱정이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의 걱정은 물세, 전기세를 못 내서 걱정이다. 걱정이 다르다. 부자가 돈이 없어서 살기가 힘들다고 하면 없는 사람이 그 말을 들을 때는 ‘저 부자가 전기세, 수도세, 방세도 못 내나보나’ 이렇게 들리기 쉽다.
늘 부자였던 사람이 갑자기 가난해지면 그 가난을 못 배겨낸다. 그래서 이룰구원 차원에서 보면 우리가 생활을 해 오면서 가난하게 되기도 하고, 풍부해지기도 하고, 사건이 있기도 없기도 하는 게 좋을 수도 있다.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마음이 풍부한 사람으로 되어서 그런 가난도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5절-6절: 미석은 아름다운 돌이다. 외국에서 수입된 매우 값진 돌이다. 이스라엘 안에서는 나지를 않는다. 당시의 성전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값진 이런 것들로 꾸며졌는데 예수님께서 그 성전에 대해 말씀하시길 ‘날이 이르면 돌 위에 돌 하나도 첩 놓이지 않고 다 허물어진다’고 했다.
이 말씀을 그 앞 절의 헌금과 연결을 시키면 ‘그 헌금을 갖다가 그 성전을 꾸미는데 다 쳐 바른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사실 오늘날 그렇게 보이는 예배당도 많다. ‘저렇게까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하는 느낌이 든다.
역사적으로나 장소적으로나 세상에 있는 건물성전은 예루살렘 안에 하나밖에 없다.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다. 이 성전은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솔로몬에게 성전을 짓는 설계를 알려줘서 짓게 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성전은 하나님의 설계대로 지어졌다. 하나님께서 그 성전의 설계를 주신 계시의 뜻은 우리의 이룰구원이, 즉 영적 성전이 하나님의 말씀의 척도에 맞도록 성장을 하라는 영인성장 면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 들어있다.
솔로몬 왕으로부터 예수님 당시까지 약 1,000년이 지나면서 내란도 있었고, 바벨론의 침공도 있었고, 로마의 침공도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가 에돔의 후손인 헤롯을 이스라엘을 통치하도록 세웠는데, 이 왕이 성전내부를 수리를 한답시고 성전 안에 손을 대어서 하나님께서 설계해 주신 것과는 너무나도 달라져 버렸다. 에서의 후손이 성전을 수리를 했으니까 에서의 그 정신 사상을 가지고 자기 보기에 좋도록 수리를 했다.
이 성전은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그 내부가 호화찬란했던 듯하다. 그런데 이 성전을 보시고 예수님의 말씀은 돌 위에 돌 하나도 첩 놓이지 않고 허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영적인 면으로 본다면 ‘성도의 속사람이 하나님의 신적인 척도로 된 게 아니라 인본주의로 됐구나’ 이게 들어있다. 쉽게 오늘날로 말하면 인간 자기 생각을 가지고 교회의 조직도, 직분도, 메시지의 내용도 전부 인조 인본주의로 됐구나. 교인들의 신앙사상이 하나님의 진리이치대로 잘 짜여져야 하는데 그게 아닌 인조 세상정신으로 됐다 그 말이다. 다 무너뜨린다는 것은 이렇게 된 건 하나님의 형벌에 다 무너진다는 예언이 되는 거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본인도 그 안의 깨달음이 하나님의 이치로 안 돼 있으면 사건의 바람에 넘어지게 돼 있다.
그 후에 이 말씀대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는데, 이렇게 무너진 것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정신 사상이라면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은 안 무너졌다고 할지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정신 사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언제고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거다. 오늘날 이걸 실지의 건물로 생각을 한다면 그 교회가 허물어질 신앙 믿음이란다면 그런 교회에서 예배당 건물을 짓는다고 할 때 그 건물에 물질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거냐? 허물어질 신앙 믿음이란다면 거기에 투자할 가치가 없는 거다.
오늘날 예배당을 성전처럼 생각을 하여 그 건물에 많은 돈을 투자하는데 그건 성전이 아니고 예배당이다. 교인들이 시간을 약속하여 모이는 장소일 뿐이다. 성도 하나하나가 약속한 정해진 시간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대로 만들어지는 곳이다. 성전은 영적인 의미로 교인들이다. 영적 성전은 사람이다. 예배당은 영적 성전으로 만들어지기 위한 하나의 장소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대로 만들어지는 교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이 만날 수 있는 성전이다.
성전 안을 들여다보면 그 성전 안에는 법궤가 있고, 그 법궤 속에 하나님의 역사로 된 게 들어있다. 이건 다 하나님의 주권섭리로 된 것이다. 이게 성도 자기다.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섭리로 돼 있는 것이 우리의 기본구원이다.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라.’ 이런 자기였는데 하나님의 선물로 성전이 된 것이다. 이건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로 돼 있는 거다.
법궤는 광야에서 자라는 가시나무의 종류다. 우리를 보면 가시나무 같은 우리다. 성격 성질이 더러운 우리다. 그러나 이 속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한 기본구원이 들어있다. 따라서 자기가 성전이다. 더 나아가서 그 정신 그 사상이 그 이치대로 신앙적으로 점점 성장을 하느냐? 그렇다면 너는 벽돌 하나하나를 쌓으면서 건물이 지어지듯이 성전을 건축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이 자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기 속에서 진리이치로 깨달은 것이 자꾸 나올 수 있다. 조명적 영감으로, 각성적 영감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이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진다. 이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는 거다. 그런데 불에 타지는 건물을 신성시해서 그 건물에 자꾸 쳐 바른다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영적인 뜻의 깨달음이나 자라는 것은 없는 거다.
우리는 성전이요, 건물은 예배당이다. 자기가 성전이 되어서 하나님 설계대로 이치대로 법칙대로 자라고 있다면 자기와 하나님과의 대화가 되는 거다. 말씀을 새김질할 때 깨달음이 되고 이치가 나온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다.
창세 이후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예루살렘의 성전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고 딴 짓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이방군대를 동원시켜서 허물어 버렸다. 우리의 몸도 성전인데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건 없고 맨 돈 계산만 하고 있다면 이건 장사꾼이다. ‘내가 십일조를 내면 얼마나 주렵니까’ 하는 이건 장사꾼이다. 그러면 그 몸은 허물어진다. 사고방식이 그러니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거다.
건물은 언젠가는 허물어질 것임을 안다면 그런 곳에 돈을 쳐 발라서 자랑을 할 수 있을까? 썩고 뭉그러지고 불타지고 허물어질 것에 하나님보다 더 신경을 쓰면서 쳐 바르지 말아라. 건물도 그렇지만 네 몸도 그렇다. 네 속을 꾸며봐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진다. 사람으로 본다면 정신이 더러운데, 소원 목적이 세상인데 자꾸 겉만 꾸민다면 피도 썩고 정신도 썩는다. 이치는 똑같다. 한 이치를 알면 다 적용할 수 있다. 적용이 안 되는 데가 없다. 허물어질 것에 돈을 쳐 바르지 말아라. 그런 걸 자랑하면 안 된다.
당신의 설계대로 지은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는 성전을 왜 허물어 버렸을까? 하나님께서 애굽을 탈출해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광야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에게 항상 옮길 수 있는 장막성전을 하나님의 설계대로 지으라고 하셨고, 또한 하나님께서 설계해 주신 식양대로 예배의식을 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것이다.
광야생활 40년이 끝날 때까지 장막성전 안에 법궤가 있었고, 광야생활이 끝나고 이스라엘이 정착되어 솔로몬 왕 때 와서는 고정된 성전이 허락되어 하나님께서 그 설계를 알려줘서 그대로 짓도록 했다. 그리고 예배식양도 주시고, 율법도 주시고,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도 주시고, 통치자도 선지자도 왕도 땅도 다 주셨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고 성전도 주셨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신 그대로 속사람이 부지런히 만들어져야 했다. 하나님을 그만큼 깨닫고 이스라엘로 잘 만들어져야 하는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이방우상을 따라가고, 세상을 따라가고, 이방사람으로 그 속이 닮아가니 하나님께서 바벨론 군대를 불러서 성전이 부서지게 했다. 그렇게 되니 성전 안의 법궤도 어느 새 없어져 버렸고, 예수님 때 와서는 성전을 수리를 했지만 껍데기만 남았다.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보혜사 성령님의 강한 역사를 통하여 전 세계로 전파되고 있다. 따라서 이 복음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영적 참 이스라엘로 만들어져야 한다. 출생해서 죽음의 선을 넘을 때까지 이 세상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는 잠깐 동안에 예배당이 있건 없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부지런히 만들어져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 육신의 몸을 전을 삼아 계시는 동안 우리는 진리로 부지런히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야 한다. 이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
우리는 나그네로 세상을 살면서 자꾸 앞으로 가는 거다. 세상이 지나가는 것은 우리도 자꾸 가는 거다. 그럴 때 우리의 정신 사상이 세상의 성질로 돌아가 버리면 하나님께서 과거의 성전을 부숴버렸듯이 네 몸도 부수겠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인 구원을 벗어난 세상살이는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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