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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보다 못한 삶
욥기 3:1~26
옛말에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조문객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썰렁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인심의 무상함에 대한 표현입니다.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만 정승과 개가 등장하는 옛말에 ‘활구자 승어사정승(活狗子 勝於死政丞, 살아있는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는 말도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 ‘수와마분 차생가원(雖臥馬糞 此生可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도 있습니다. 비록 세상살이가 고달프고 힘겨워도 죽음보다는 삶이 낫다는 뜻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생명은 존귀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쿠마에의 무녀가 병 속에 있는 걸 보았다. 소년들이 말했다. ‘무녀여, 원하는 게 무엇인가?’, 그녀가 대답하였다. ‘죽고 싶어.’”
미국계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의 <황무지>(1922)에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기록된 첫 문장입니다. 이탈리아 남부 도시 쿠마에에 유명한 무녀가 있었습니다. 무녀를 총애한 아폴론이 그녀의 청을 들어주어 한 주먹의 모래알 숫자만큼의 나이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무녀는 청춘을 겸하여 요구하지 못했습니다. 영생을 얻기는 하였지만 날마다 늙어갔습니다. 결국에는 목소리만 남고 몸은 보이지 않을 정도까지 작아졌습니다. 무녀는 살아있지만, 차라리 죽음이 꿈이었습니다. <황무지>는 산스크리트어 “Shantih shantih shantih”(평화 평화 평화)로 끝납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끝난 후 절망하는 유럽 사회를 묘사하였습니다.
욥은 한꺼번에 자녀와 재산을 잃었습니다. 몸에는 온통 악성 종기가 나 잿더미에 앉아서 옹기 조각으로 긁어야 했습니다. 이유라도 알 수 있다면 나으련만 이유도 모른 채 고통의 한가운데 홀로 남겨졌습니다. 인생의 반려자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악담을 퍼붓습니다. 그런 중에도 욥은 중심을 잃지 않고 말로 죄를 범치 않았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2:10). 욥은 죽음보다 못한 삶을 침묵으로 보냅니다. 다행히 멀리서 온 세 친구가 침묵의 위로자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욥의 침묵이 중단되었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어머니 배에서 나오는 그 순간에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가?”(3:11) “어찌하여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태어나게 하셔서 빛을 보게 하시고, 이렇게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가?”(3:20) “어찌하여 하나님은 길 잃은 사람을 붙잡아 놓으시고, 사방으로 그 길을 막으시는가?”(3:23) 욥이 쏟아내는 말들은 침묵하기 전의 모습과 다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부정합니다. 창조 이전으로 되돌릴 것을 호소합니다. 극심한 고통의 현실을 과하다 싶을 만큼 가감 없이 표현합니다. 욥은 죽음을 갈망합니다. 죽음은 삶에 지친 이들에게 쉼의 장소이며 갇힌 이들은 평화를 누리고, 노예는 자유를 획득하는 곳입니다. 욥은 탄식합니다. “죽기를 기다려도 죽음이 찾아와 주지 않는다”(3:21)
욥의 불평을 접하면서 욥도 육체를 지닌 사람임을 확인합니다. 슬픔과 고통의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는, 육체 없이 영혼만 존재하는 천사가 아닙니다. 처절한 현실에 반응하는 모습이 사람입니다. 아픈데 아프지 않은 척하는 것은 기만이고, 슬픈데 슬프지 않은 척하는 것이야말로 위선입니다. 욥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지금 우리는 모두 아프고 슬픕니다.
주님, 죽음을 피난처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극심한 고통과 헤어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삶보다 죽음을 먼저 생각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이들의 짐을 가볍게 해주십시오. 난민촌까지 공습을 받고 있는 팔레스타인에 평화를 주십시오.
2023. 11. 6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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