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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착한 말
욥기 4:1~21
말로 사는 사람이 있고 몸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사나 목사나 정치인이나 언론인 등은 말로 사는 사람입니다. 말을 조심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총으로 맞아 죽은 사람보다 말의 화살에 상처받은 사람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총상의 치료보다 말로 입힌 상처의 치유가 훨씬 어렵습니다. 말씀을 중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새겨들어야겠습니다.
평화도 없고, 안정도 없고, 안식마저 사라져 두려움에 무방비로 노출된 욥을 위로하러 온 친구 가운데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있습니다. 데만은 에돔의 수도 페트라 동쪽의 도시입니다.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데만에는 지혜자가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이제 데만에 더 이상 지혜가 없느냐? 명철한 사람들에게서 좋은 생각이 다 사라져 버렸느냐? 그들의 슬기가 끝이 났느냐?”(렘 49:7) 욥기의 배경 시대를 보통 아브라함 이전의 족장시대로 보는 견해가 다수라는 점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이 신화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 이성 중심의 세계로 나오는 시점인 기원전 6세기 밀레토스학파의 탈레스나 아낙시만드로스나 아낙시메데스보다 적게 잡아도 1200년이나 앞섰다는 점에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욥기>가 기록된 시기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지혜문학이 왕성하던 솔로몬 시대로 보더라도 서양 철학보다 앞선 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실리를 추구하는 시대에 지혜를 구하는 이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욕망과 권력이 난무하는 오늘 같은 시대에 지혜를 추구하는 삶이 절실합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예언자 하박국은 하나님을 지혜자의 마을 ‘데만에서 오시는 분’으로 묘사하기도 하였습니다(합 3:3). 인간세계에 오시는 하나님은 ‘지혜자’로 오십니다. 지혜를 멸시하는 일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입니다. “지혜를 버리지 말아라. 그것이 너를 지켜 줄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여라. 그것이 너를 보호하여 줄 것이다”(잠 4:6).
엘리바스가 말합니다. “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4:7) 그의 말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입니다. 착한 행실에는 복이 따르고, 악한 행실에는 벌이 임한다는 논리입니다. 지금 욥이 당하는 고통에는 이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엘리바스의 말은 참말입니다. 그런데 참말에 감동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말로 삶을 잇는 사람들이 조심할 일입니다. 말은 바로 하는 데 공감하기에는 거리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하는 이의 행동이 자기 말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말이 너무 정답 같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정답 찾기가 아니라 해답을 찾는 과정입니다. 게다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일 없다’는 식의 엘리바스의 논리가 바로 사탄의 논리(1:9~11, 2:4~5)와 잇닿아 있습니다. 누구라도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바른말이 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엘리바스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욥의 고난에는 이유가 없다는 점입니다. 세상에는 자기 잘못이 아닌 일로 화를 당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크라이나 시민이나 가자 지구의 어린이들이 자기 잘못으로 생명을 잃었습니까? 세월호의 학생들과 이태원의 청년들이 제 잘못으로 화를 당했습니까? 엘리바스의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맞는 말도 아닙니다. 말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말로 사는 분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 저도 말로 살아왔습니다. 허튼 말로 남을 설득하였고, 내 말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우기기도 하였니다. 엘리바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사탄의 논리를 대변하지 않았는지 반성합니다. 한번 한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지만 앞으로는 더 신중하고 조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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