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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란?
욥기 6:1~30
마침내 침묵하던 욥이 입을 열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이 자기 잘못 때문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과녁으로 삼고 화살을 쏘시니, 내 영혼이 그 독을 빤다. 하나님이 나를 몰아치셔서 나를 두렵게 하신다”(6:4). 욥은 너무 괴로워서 말이 거칠어졌고 짐승처럼 울부짖었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았습니다. 평생의 반려자인 아내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악담을 하였고, 먼 데서 온 친구들마저 딴소리만 하였습니다. 없는 죄를 찾아내어 회개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말에 본문과 어울리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 있습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입니다. 욥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위로하기 위하여 먼 길을 찾아온 친구의 말이 도리어 욥의 고통을 가중시켰습니다. 세 친구 가운데에 먼저 입을 연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충고는 위로의 말이기보다 힐난에 가깝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찌르기도 하시지만 싸매어 주기도 하시며, 상하게도 하시지만 손수 낫게도 해주신다”(5:18)며 하나님께 사정을 아뢰라고 조언하였습니다. 지극히 합당한 말이지만 이 말이 욥에게는 채찍처럼 들렸습니다. 말에는 치료의 힘도 있지만 고통을 더하는 능력도 있습니다. 이치에 어긋나는 말을 해서가 아니라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여야 합니다. 말을 가려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욥은 친구들에 대하여 실망하였습니다. “바른 말은 힘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너희는 정말 무엇을 책망하는 것이냐? 너희는 남의 말 꼬투리나 잡으려는 것이 아니냐? 절망에 빠진 사람의 말이란, 바람과 같을 뿐이 아니냐?”(6:25~26) 욥은 친구들에 대하여 서운하고 섭섭합니다. 친구들은 위로하기 위하여 왔지만 사실은 고통을 더하였습니다. 친구들의 한마디 한마디 말이 욥의 폐부를 찌릅니다. 그렇다고 친구들의 말이 틀렸다거나 지나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인생이 고통이 갖는 무게감은 생각 이상이며 그 처지는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단순한 상식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욥의 저항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엘리바스와 친구들의 지극히 합당한 말에 대한 거부감입니다. 좋은 친구라면 친구를 이해하는 일이 먼저여야 마땅합니다. 말꼬투리를 찾아 책잡기보다는 친구의 편을 들어주며 두둔하거나 대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친구를 곤경에 처할 목적이 아니라면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울고 싶은 마음이었던 욥의 뺨을 친구들이 가격한 꼴입니다.
역경을 만나야 누가 진정한 친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욥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성공의 때에 만난 친구를 역경의 때에야 그 진정성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란 두 개의 몸에 깃든 한 영혼’이라고 하였습니다. 시인 윤보영은 <친구란>에서 “신던 신발처럼 편안한 것/때로는 새로 산 신발처럼/견딜만큼 아픔도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동 한 그릇을 같이 먹어도/배가 부른 것”이라고요. 좋은 친구가 그리운 때입니다. 가르치려고만 하는 친구 말고…, 바른 소리만 하는 친구 말고…, 비 오는 날 우산 씌워주는 친구 말고… 내일은 친구에게 전화라도 한번 걸어야겠습니다.
주님, 저는 오늘 어떤 태도로 친구 옆에 서 있는지를 살핍니다. 저 역시 바른말 하기 좋아하였습니다. 친구가 당하는 아픔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뒷전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 태도를 바꾸겠습니다. 잘 안되더라도 이해와 관용을 관용의 실천을 노력하겠습니다.
2023. 11. 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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