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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앎과 삶의 괴리
욥기 7:1~21
인생사가 생각처럼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다는 게 일반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이것을 지혜문학에서는 규범적 지혜라고 말하고 저는 그저 삶의 제1원리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경험하여 아는 대로 착하게 사는 사람이 복을 받지 못하는 일이 왕왕 있습니다. 아니 악하게 사는 사람일수록 성공합니다. 남의 것을 훔치고 속이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이들이 더 잘삽니다. 정직한 의인들이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악스럽고 악착같은 이들이 권력을 붙잡습니다. 원칙을 지키는 이들이 바보 취급을 당하고 규칙을 위반하는 자들이 득세합니다. 정치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천지가 다 그렇습니다.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좋았다’ 하신 반응에 반하고 부정하는 일들입니다. 왜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그치지를 않는 걸까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이 정의로운 분이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요? 하나님이 실수하신 걸까요? ‘도덕적 인간이 만든 비도덕적 사회’라는 라인홀드 니부어(1892~1971)의 생각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제가 갖고 있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하나의 원리, 규범적 지혜의 원칙만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원칙이 세상의 가장 기본이 되는 원리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인생사와 세상사에는 규범적 지혜의 원리가 지켜지지 않을 때가 무수히 많습니다. 삶의 제1원리가 무너지는 현상도 하나의 원리로서 저는 그것을 삶의 제2원리라고 부릅니다. 지혜문학에서는 성찰적 지혜라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고 섭리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하나의 원리만 주셔서 사람을 기계화하거나 역사를 일방이 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삶의 제2원리를 허용하시므로 인생은 자기 한계를 깨달아 신앙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사유와 성찰이 깊어지게 하여 철학적 존재가 되게 합니다. 패배자의 아픔을 이해하는 관용의 마음과 상처 입은 약자에 대하여 긍휼의 마음을 갖게 되며 선한 의지를 작동하여 정의를 추구하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삶의 제2원리 역시 하나님의 통치 수단입니다.
하지만 이런 원리를 알고 있다는 것과 그 앎을 몸으로 살아낸다는 것 사이에는 괴리가 있습니다. 그 간극이 크면 클수록 고통이 크고 갈등이 깊습니다. 욥의 고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안다고 해서 고통이 경감되지 않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인생의 허망함을 말합니다. “인생이 땅 위에서 산다는 것이, 고된 종살이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 그의 평생이 품꾼의 나날과 같지 않으냐?”(7:1) 하나님을 향해서도 탄식합니다. “내가 바다 괴물이라도 됩니까? 내가 깊은 곳에 사는 괴물이라도 됩니까?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나를 감시하십니까?”(7:12), “나는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제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 나날이 허무할 따름입니다”(7:15). 욥의 탄식과 독백은 앎과 삶의 괴리가 큰 자의 어쩔 수 없는 고백입니다. 삶의 제1원리와 제2원리 사이를 사는 모든 인생의 문제인 셈입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십시오.”
라인홀드 니부어의 기도문입니다. 하나님,
세상은 여전히 희망 없는 삶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애는 써도 달라지지 않는 인생과 역사 앞에 절망할 뿐입니다. 주님, 육체를 지닌 인간이 불평하는 것까지 용납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욥처럼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2023. 11. 1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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