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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의 고난
욥기 9:17~35
욥은 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고통을 주시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자기 몸이 병들었다는 것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잃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전존재의 상실입니다. 욥이 완벽한 의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하는 재난에 이를만큼 죄에 오염된 삶을 살지도 않았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이 이유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은 천상 회의에서 하나님과 사탄이 주고받은 대화를 알 턱이 없습니다. 그러니 고통은 더욱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유 없이 당하는 고통, 아니 알 수 없는 이유로 받는 고통은 욥을 불안하게 하였고,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이즈음에서 우리가 생각할 주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통에는 징계의 의미가 있는가 하면 징계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고난도 있다는 점입니다. 징계로 오는 고통은 죄를 회개하고 반성하면 될 일입니다. 악에서 돌이켜 바른길을 걸으면 주님께서 회복의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유 없이 오는 고난은 대처하기가 난감합니다. 진단이 가능하지 않으니 처방전이 있을 리 없습니다. 욥의 두려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알면 고칠텐데 알 수가 없습니다. “비록 내가 옳다고 하더라도, 그분께서 내 입을 시켜서 나를 정죄하실 것이며, 비록 내가 흠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분께서 나를 틀렸다고 하실 것이다”(9:20). 욥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무죄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는 쉽게 자기 고난의 이유를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야고보서는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약 5:11) 하면서 인내의 상징적 인물로 욥을 소개합니다. 욥은 친구들이 전하는 고난의 논리적 이유를 거절하고 이유 없는 고난을 견뎌냅니다. 그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욥의 처지가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대견해하는 사람이 고난을 받습니다(1:8). 하나님께서 자랑삼는 사람이 고통에 처합니다(2:3).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이유 없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을 받고 존경받아야 할 사람인데 사회적 비난과 인격 살인 앞에 속수무책 무너지는 이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의의 편, 평화의 편, 하나님의 편이듯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편이 되어주신다고 믿습니다. 욥을 대견해하시고 자랑삼으시는 하나님께서는 고난받는 욥에게 무언의 응원을 보내실 것이 분명하고, 이 시대에 욥처럼 이유 없이 당하는 고난의 사람들을 편들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욥은 자신이 고통당하는 현실을 악한 자가 권세를 잡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합니다. “세상이 악한 권세자의 손에 넘어가도, 주님께서 재판관의 눈을 가려서 제대로 판결하지 못하게 하신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렇게 하는 이가 누구란 말이냐?”(9:24) 부지런하고 착한 사람이 가난한 이유는 세상 권세를 맡은 자가 불의하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받는 이유는 세상에 악이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일조차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방관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다못해 탄식하고 저주하는 일이라도 하여야 마땅합니다.
고통받는 욥의 모습은 오늘의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욥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산 사람도 고난을 받는데 매일 실수하고 매일 한눈팔고 매일 머뭇거리고 매일 핑계와 변명을 일삼는 저로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주님, 의롭고 착한 이들이 고난받고 있습니다. 일제에 의해 청춘을 희생당한 위안부 할머니의 상처받은 영혼을 보듬어 주던 윤미향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명예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칭찬받아야 할 이들이 지탄받고 있습니다.
2023. 11. 1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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