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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능력
욥기 11:1~20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은혜란 원인 되는 행위 없이도 놀랍고 감사한 결과가 주어지는 원리입니다. 심지도 뿌리지 않은 곳에서 거두고, 때지 않았는데 연기가 납니다. 빈 항아리에 물을 부었는데 포도주가 되는 원리가 은혜입니다(요 2:1~11). 이런 원리를 바울은 ‘값없이 의롭게 되었다’고 표현합니다(롬 3:24). 규범적 지혜 그 너머의 자리입니다. 규범적 지혜란 콩 심은 데서 콩 나는 원리입니다.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 존경받고 부지런한 사람의 살림이 풍족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과 아침과 낮과 밤 등 자연의 이치를 알고 그에 맞게 살면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욥을 모함하는 무기도 규범적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베푸셨으니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니, 은총을 거두면 경배도 중단될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사탄의 논리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사탄은 그것밖에 모릅니다. 욥의 친구들이 갖는 한계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는 상식을 초월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욥을 위로하러 온 나아마 사람 소발이 말합니다. “네가 하는 헛소리를 듣고서, 어느 누가 잠잠할 수 있겠느냐? 말이면 다 말인 줄 아느냐?”(11:2) 그의 말은 거칠고 안하무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러시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완전한 의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벌을 받을 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 이유를 알려주면 좋겠다’는 욥에게 퍼붓는 말입니다. 도에 지나치고 상스럽습니다. 그렇다고 틀린 말은 아닙니다. 소발이 하는 말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다 논리에 맞습니다. 하지만 소발은 삶의 1차원적인 원리 그 이상을 보는 눈이 뜨이지 않았습니다. 욥은 1차원적인 원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을 직면하고 이를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소발은 친구인 욥의 고난에 공감하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공감 능력이 없는 친구를 사귀는 것은 버겁습니다.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이 종교인이 되면 종교는 예전과 의식에 매몰되고 본연의 정신은 말라버립니다. 공감 능력이 없는 정치지도자가 등장하면 세상은 살벌해지고 사회적 약자들이 고통당합니다. 주전 472년 아테네에서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가 <페르시아 사람들>을 공연하였습니다. 이 연극의 후원을 청년 정치인 페리클레스가 담당하였습니다. 연극은 그리스 도시 국가가 페르시아와 벌인 전쟁인 살라미스해전(주전 480)을 다루었습니다. 아이스킬로스는 이 전쟁은 물론 마라톤전투(주전 492)에도 참전하였고 이 연극을 관람하는 시민 중에도 참전 용사가 많았습니다. 관람객들은 연극에서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의 기쁜 함성을 기대하며 야외극장에 모였습니다. 하지만 연극은 내내 침울하고 무겁고 어두웠습니다. 그리스 병사의 용맹스러운 전투 장면은 없었고 승리의 함성도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페르시아 진영의 깊은 한숨과 절망을 담고 있습니다.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혼백의 독백과 패전 소식을 듣는 크세르크세스의 어머니 아톳사의 한숨, 그리고 코러스의 무거운 음악이 야외극장을 가득 채웠습니다. 연극을 관람하는 아테네 시민들은 적의 패전과 절망에 가슴을 졸이며 탄식하며 안타까워하였습니다. 페리클레스가 시민의 이런 반응을 읽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다.”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가 현대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대목입니다.
주님, 저희는 공감 능력 부재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정치는 기득권을 옹호하는 이들이 틀어쥐고 있고, 종교도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죄인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친히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가르침이 절실한 때입니다.
2023. 11. 1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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