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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게
욥기 13:20~14:22
욥은 당돌해 보일 정도로 하나님께 따져 묻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대답해 주십시오. 내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내가 어떤 범죄에 연루되어 있습니까? 어찌하여 주님께서 나를 피하십니까? 어찌하여 주님께서 나를 원수로 여기십니까? 주님께서는 줄곧 나를 위협하시렵니까?”(13:22~25) 아무리 허물과 죄가 없는 욥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 아뢰는 말이 지나쳐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욥의 이런 말을 듣고 언짢아 노하셨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욥이 하는 당돌한 말들을 들으며 흐뭇해하지 않으셨을까요. 욥의 말은 온갖 죄를 저지르고 반성할 줄 모르는 불한당의 자기변명이 아닙니다. 법치주의라는 이름으로 법에 문외한을 겁박하는 법 깡패의 윽박지르기와도 결이 다릅니다. 힘 앞에 온갖 굴욕을 당하면서도 항변 하나 못하는 불쌍한 민초의 무능도 아닙니다. 욥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한계를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인생이 살아갈 날 수는 미리 정해져 있고, 그 달 수도 주님께서는 다 헤아리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한계를 정하셨습니다”(14:5). 그러면서 자신을 호되게 다루시는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맞서 질문합니다. 도대체 그의 이런 배짱과 담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역사에는 이유 없이 고난에 처한 이들이 많습니다. 1761년 프랑스 툴루즈의 위그노 장 칼라스는 사회적 신분의 벽을 뛰어넘지 못해 스스로 삶을 마감한 아들의 일로 존속살해죄라는 누명을 쓰고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평화를 추구해야 할 종교가 가짜 뉴스를 퍼트리고 증오를 증폭시켰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일이지만 이 사건으로 프랑스 사회에 톨레랑스(관용) 의식이 확장되었습니다. 톨레랑스란 정치와 종교와 도덕, 학문, 사상, 양심 등의 영역에서 의견이 다를 때 논쟁은 하되 물리적 폭력에 호소하지는 말자는 이념입니다. 볼테르는 사회의 양심을 깨우는 《관용론》을 썼고, 화가 드바 퐁상은 <우물을 탈출하는 진실>을 그려 권력과 법과 종교를 비판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의 주장에는 반대하지만 그것을 말할 권리를 위해 나는 당신 곁을 지키겠다’는 말도 이런 맥락입니다. 장 칼라스 사건은 프랑스 대혁명(1786)이 가능할 수 있었던 한 이유이기도 하였습니다.
드레퓌스 사건도 그렇습니다. 보불전쟁(1870~1871)) 이후 프랑스는 군국주의와 반유대주의 열풍에 사로잡혔습니다. 1894년 프랑스 포병 대위 드레퓌스가 간첩죄로 체포되었습니다. 드레퓌스의 필체가 독일 대사관에 빼돌린 비밀문서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이유였습니다. 유대인인 드레퓌스는 무리하게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남아메리카 악마섬에 갇혔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1897년 진범이 잡혔지만, 군부와 정부는 신뢰 추락을 이유로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하였습니다. 이때 에밀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를 썼고, 많은 지성인들이 탄원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군부 개혁을 일으켰고, 공화정을 안착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종교는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근래에 우리 주변에도 상을 받고 존경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거짓 선동과 음모론자들에 의하여 모욕과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속상하고 몹시 안타깝습니다. 그들이 그동안 걸어온 길이 진실이라면 욥처럼 당돌해야 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당당하게 믿었습니다.
주님, 이유 없이 남을 해치며 악행을 일삼는 악인들을 징벌하여 주십시오. 고난에 처한 의로운 이들이 겸손한 자세와 더불어 당당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을 주십시오.
2023. 11. 1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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