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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굶주린 영혼을 먹이신다 (토저 시리이즈28)
A. W. 토저 지음/이용복 옮김
272p 15000원 규장 2018
책 구입 링크 https://gpf.kr/fCRC6
하나님은 굶주린 영혼을 먹이신다.
1.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라.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는 창조주를 향한 거부하기 힘든 갈망이 숨어 있다. 이 갈망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류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이 갈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인간의 영혼은 평안을 모르기에 인간은 이를 채우고자 끊임없이 애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의 마음 속 큰 목표는 그분의 임재의 거룩한 위엄을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순간순간마다 그분과 함께 거하며 온전한 안식을 누릴 때 그분은 크게 기뻐하신다. 그분은 우리와 교제를 나누며 기쁨을 누리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다. 그분의 임재를 체험할 때 느끼는 기쁨에 필적하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된 모든 인간의 가슴속에 깊이 묻혀 있는 큰 소원은 그분의 임재의 거룩한 위엄을 경험하는 것이다.
2.장애물을 넘어서는 용기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가려는 욕구가 인류 영혼의 깊은 곳에 잠재해 있다. 하지만 그분께 나아가는 길에 있는 장애물들을 극복하기란 역부족이다. 가장 주된 것은 인간의 ‘속량 받지 못한 본성’이다. 죄의 본성과 하나님의 본성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 우리가 가장 힘써야 할 것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들에 관심을 쏟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의 체험은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극복해야 하는 선한 싸움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그분의 임재를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앞에 놓인 주요 장애물들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있다.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모든 그리스도인은 나름대로 장애물을 만난다.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한 위험한 상황은 ‘양심의 소작(燒灼)’ 때문에 생긴다. 간단히 말하면 ‘도덕적 무감각’이다. 그리고 ‘영적 무기력’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를 듣고서도 부자연스런 영적 나른함에 빠지는 것이다. 도덕적 무감각과 영적 무기력은 우리가 영적 건강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두 가지 주요 재앙이다. 또 다른 문제는 ‘먹고 사는 것’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세상의 염려’(마13:22)라고 부르셨다. 또 하나의 장애물은 ‘끝없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영적인 일들과 세상 일들 사이의 차이가 무엇일까? 영적인 것들은 아주 점잖다. 그러나 육신의 일들은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큰 소리로 말한다.
3.유일하고 완전한 안내자
하나님 앞에서 기쁨과 평안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려면 혼자의 힘으로는 안 된다. 그분의 존전에 이르는 것은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노련한 안내자가 필요하다. 구약의 제사장은 하나님에 의해 임명되어 중요한 영적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임재의 본질적 성격 때문에 우리에게는 노련한 자격이 있는 안내자가 필요하다. 우리를 그분의 존전으로 담대히 이끌고 갈 수 있는 자격 있는 제사장이 바로 그런 안내자이다. 성경에 의하면 제사장은 몇 가지 자격 요건을 갖추어야 했다. 우선, 하나님에 의해 임명되어야 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한 제사장은 가짜였다. 두 번째 조건은 사람들을 위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사장이 하는 일은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이었다. 제사장은 그가 드리는 제물의 피로 자기의 죄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었고 단지 제한적으로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이룰 수 있는 자격을 완벽하게 각춘 분이셨다. 그분이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이었고, 이것이 첫 번째 자격 조건이었다. 그분만이 우리의 안내자가 되어 그분의 존전에 이르는 길을 안내해주실 수 있다. 그분께 이르는 길은 편하지도 않고 지름길도 없다.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지름길을 가시지 않았고 오히려 고난의 길을 끝까지 가서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를 위해 죽음을 맛보시고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셨으므로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들은 완전한 안내자를 찾은 것이다. 그분을 따르는 중에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안식과 평안을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4.우리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 요소, 즉 초월적 요소와 신비적 요소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말 속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없어서는 안 되는 개념들이 몇 개 있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의 임재의 본질은 인간의 본성을 초월하기 때문에 단순히 인간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의 모든 부분이 소위 ‘초월적 세계관’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 초월적 존재는 고정되어 있고, 최종적이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이 기본적 진리에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분에게는 시작이 없었다는 것, 그분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포함된다. 살아있고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빛에 민감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히11:10)을 볼 수 있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천국에 직접 가보지 않아도 천국을 볼 수 있다.
5.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라
우리는 성경의 본에 따라야 하며, 그것에 무엇을 보탤 수 있는 권세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하나님은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출25:40)라고 명령하셨다. 세상의 모든 불행은 인류가 산에서 제시된 본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자기의 방법대로 자유를 꿈꾸는 자가 자유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찾아가신 사람, 그분을 마음 안에 모신 사람,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자유인이다. 산에서 계시된 본을 따르기를 힘써라. 그것이 참된 자유의 길이다. 사람들의 말을 따르면 잘못된 길로 가게 된다. 당신이 산에서 주어진 본을 따르면 자유와 행복과 완전한 안식에 이를 것이기 때문에 당신의 잠재적 가능성을 전부 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그분께 순종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그분의 말씀을 믿고 굳게 붙들자. 가장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가장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이다. 이제 하나님의 책으로 돌아가자. 앞으로 나아가 그분의 책에 도달하자. 이 책에 대해 그분께 감사하자. 모든 것을 산에서 제시된 본에 따라 행하도록 노력하자. 당신의 믿음과 발걸음이 그분의 길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참되고 순수한 자유는 하나님의 임재에서 발견된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를 위해 제시하는 본을 따르면 그분의 임재를 맛보다 결국 이런 자유에 이르게 된다.
6.하나님 마음의 청사진을 보이시다
구원의 온전한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의 임재를 즐거워하시는 것이고, 또한 우리가 의식할 수 있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의식적 임재를 즐기고 있다면 구원의 근본적 목적을 성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임재를 회복해야 한다. 그분 앞에서 사는 법, 즉 그분의 분명한 임재를 맛보며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부흥과 부흥이 아닌 여타의 영적 상태를 구분하는 기준은 교회가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를 아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관련된다. 교회의 영적 상태가 좋지 않을수록 그분의 나타나심이 줄어들고, 교회의 영적 상태가 좋을수록 그분의 나타나심이 많아진다. 그러므로 그분을 예배하기 위해 모일 때 그분의 영광스런 나타남을 체험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오락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모든 부흥은 교회가 주변 세상과 완전히 반대 입장에 섰ㅇㄹ 때 일어났다. 우리의 예배는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이 불편해 할 정도로 거룩해야 하고, 하나님의 임재의 느낌으로 충만해야 한다. 사람들이 예배 참석을 위해 교회로 올 때에는 오락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거룩한 나타남을 기대하며 찾아올 정도가 되어야 한다.
7.두 개의 휘장
구약의 성막은 두 개의 방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첫 번째 방인 ‘성소’에는 등잔대와 진설병이 있었다. 이 첫 번째 방과 두 번째 방 사이에는 두 방을 나누는 휘장이 있었고, 이 휘장 뒤에는 지성소가 있었다. 이 지성소는 ‘누군가 계신 곳’이었다. 일반 제사장들은 그곳에 들어갈 수 없었고, 오직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다. 거룩한 임재안으로 들어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임재’가 있다는 것이다. 이 임재는 물론 거룩한 분,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즉 그분의 영이 떠나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디에나 임재하신다고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을 찢어 치워버리셨지만 우리는 손을 놀려 휘장을 꿰매어 다시 쳐 놓았다. 자기사랑, 자기연민, 자기신뢰, 그리고 가지만족 같은 자기중심적 죄들로 엮어 만든 베일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아의 베일을 찢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 가기를 원치 않는 이유는 그렇게 하려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는 것에 만족한다. 자아의 베일을 찢어야 한다. 사랑 안에서 믿음을 붙잡아야 한다.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아에게 등을 돌려야 한다.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임재를 부담스럽게 여겨 뒷걸음질 치는가?그것은 그분의 얼굴을 보는 것이 그분의 모든 백성에게 더할 나위 없이 귀한 것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8.영적 잡초를 제거하라
영혼의 정원에서 자라난 잡초를 보라. 그것을 뽑아내면, 진리가 어디서 자라나는지 보일 것이다. 잡초1) 그리스도는 우리의 편이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어떤 이들은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과 다르시다고 말한다. 이런 영적 잡초를 뽑아내야 한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편이시고, 하나님이신 성부도 우리의 편이시며, 하나님이신 성령도 우리의 편이시다. 삼위일체가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 인간을 사이에 두고 성부와 성자의 뜻이 갈리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잡초2) 구약의 메시지와 신약의 메시지는 다르다.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심판과 은혜가 신약성경에 모두 나온다. 그리고 구약성경에도 심판과 은혜가 모두 나온다. 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동일하시다. 잡초3)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사랑은 그 정도가 다르다. 성부와 성자는 성자께서 세상의 죄를 위해 돌아가셔야 한다는 것에 완벽하게 의견의 일치를 보셨다. 잡초4)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신 분은 오직 성자 하나님이시다. 성삼위 모두 속량에 참여하셨다. 성부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드려진 제물을 받으셨다. 그 제물은 흠 없이 점 없이 드려진 어린양이신 성자이셨다. 온갖 이단들, 말에 담긴 본래의 의미를 따라버리고 엉뚱한 것을 집어넣는 자들, 이상한 글을 써서 당신을 바보로 만들려는 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깨달았기 바란다. 의식할 수 있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는 성삼위의 협동의 결과이다.
9.하나님 앞에 함께 누리는 교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물리적 의미에서 가까이 간다는 뜻이 아니라, 두 영적 존재가 직접적인 관계를 풍성히 즐긴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음속 깊은 곳끼리 소통하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이다. 천국에 이르는 딱 한 가지 방법은, 바로 걷는 것이다. 믿음으로 걷는 것 말이다.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는 비법을 한 가지 말해주겠다. ‘버텨내라’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권면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24절)처럼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행하도록 계속 권면하고 설득하고 격려해야 한다. 또한 “모이기를 폐하지 말자”(25절)라는 것이다. 사도적 교회 , 즉 교회를 사모하는 마음이 없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 출석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원인은 딱 하나인데, 그것은 우리의 심령이 냉랭해졌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본성은 함께 모이는 것이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행4:23)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이 모이는 또 다른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다른 신앙인들이 내게 필요 없다고 느낄 때야 말로 그들이 정말로 내게 필요한 때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신앙인에게 말씀하실 수 없는 것을 신앙인 모임에 말씀하실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정기적으로 회당에 가셨다. 히브리서 10장의 네 가지 권면의 요점은 이것이다. ‘하나님께 나아가자’,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자’, ‘서로 돌아보자’, ‘모이기를 폐하지 말자’.
10.하나님의 임재를 방해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가 아니면 어떤 제사도 소용없다. 불신앙 가운데 머물기를 고집하는 사람이 갈 곳은 더 이상 없다. 제단을 세우고 다른 어린양을 드릴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자.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등을 돌리고 여전히 죄를 지으며 짐짓 불신앙의 길을 가며 그분과의 동행을 거부한다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갈 곳이 없고 죄를 위한 제사도 없다. 숨을 곳은 없다.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가짜 피난처를 만들어내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거부하고 다른 곳에서 희망을 찾으려 한다면 다른 제사를 찾는 것인데, 다른 제사는 더 이상 없다. 오직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숨어라. 그분의 보혈 밖에서는 피난처, 죄를 위한 제사, 회개, 의, 선행, 어린양이나 비둘기나 붉은 송아지를 드리는 제사 같은 것들이 무의미하다. 이런 것들은 모두 소용없다. 다른 피난처는 없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기쁨의 삶을 사는 것만큼 마귀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헤이해지면 안 된다. 우리는 조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마지막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어린양의 보혈의 능력으로 인하여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하기 원하는 우리에게 다른 속죄의 제사는 필요 없다.
11.기억하고 기대하는 믿음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계속적으로 유지하는 비결은 열심을 내는 것이다. 그분 앞에 이르는 것은 우리 싸움의 절반에 불과하다. 우리의 싸움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그분 앞에 계속 머무는 것이다. 그분 앞에서의 삶을 추구하는 열정의 불이 계속 타오르게 하려면 적절한 연료가 지속해서 공급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열정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성경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라고 말한다. 여기서 믿음은 온전한 확신을 의미한다. 한 번 믿고 마는 것이 아니다. 한 번 행하고 끝내는 것도 아니다. 언제나 당신을 떠나지 않는 온전한 확신을 가리킨다. 믿음은 온전한 확신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믿는 확신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다. 영적 느낌이 전혀 없을 때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종종 찾아올 수 있는데 그럴 때에도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면 화를 내며 기도를 중지하지만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우리는 뒤로 물러가는 자들처럼 되지 않고 믿음으로 전진한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고 얼마나 굳세게 믿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이들과 같아 보여도 그들 같은 사람들은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12.하나님의 임재를 훈련하라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습관’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중 극소수의 사람만이 자신의 영적 성장과 발전을 위해 정교한 습관을 만들어나간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구원의 충만함을 즐기며 사는 사람은 너무나 적다. 많은 이들은 천국이라는 종착지에 만족하면서도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소홀히 한다. 날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든 것을 아주 낯설어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은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에 흥미를 잃게 된다고 믿는다. 밀물처럼 몰려와 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연애오락은 그에게 절망적인 공허감만을 안겨줄 뿐이다. 교회 안에 만연한 개인숭배도 그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 주변의 세상이 우리 안에 있는 말씀과 충돌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오락과 재미의 토대 위에 서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오락과 재미를 충분히 준비하지 않으면 사람들을 오게 하기가 꽤 어려운 것을 본다. 그런데 이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 그것은 정욕과 탐심이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대신하는 싸구려 대용품’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성경을 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우리에게 불어오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이를 훈련해야 한다. 고독으로 나아가야 한다. 고독은 가장 힘든 영적 훈련 중 하나이다. 훈련과 반복이 요구된다. 자기에게 관심을 쏟아달라고 아우성치는 주변의 온갖 목소리들을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이것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들에게 먼저 신경 써 달라고 소리친다. 하나님을 만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매일매일 찾아온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다. 우리의 예배와 찬양은 신성모독에 가깝고, 천박하며 조잡하다. 이런 모든 현상은 우리가 섬기는 영광의 그리스도의 위엄과 맞지 않는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경외하는 것이다.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일은 온전한 기쁨과 매력으로 충만한 순례 여행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비버처럼 바쁘다. 교회의 모든 일련의 행사를 보면 남들이 하면 나도 한다는 식으로 따라하며 끌려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의식할 수 있는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를 맛보든 것을 방해한다. 죄는 아니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결심하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 분별력을 발휘하여 이런 것들을 밝혀내고 영구적으로 뽑아내어버리는 담대함이다. 확신하건대, 하나님은 당신이 전심으로 그분을 찾으면 그분을 깊이 경험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정리 이재익 목사(일본 니이가타교회)
월간<들꽃편지> 제656호에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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