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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잣대
욥기 15:17~35
상줄 일을 만드는 사람과 벌줄 일을 만드는 사람의 인생관은 다릅니다. 착한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보는 눈도 선하고 순수하고 의타적입니다. 사소한 일에도 아낌없이 칭찬하고 격려합니다. 그러나 악한 자를 찾아내 벌을 주려는 사람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악인으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사람을 잠재적 죄인으로 의심합니다. 날카롭고 불순하고 배타적입니다. 아주 작은 실수나 잘못을 확대하여 소란을 키웁니다. 벌주는 사람보다 상주는 사람이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찰이나 검찰이나 군인은 필요악입니다. 이런 직업과 그런 사람이 없어야 좋은 세상이 옵니다. 그런데 세상은 도리어 이런 사람들이 출세하고 권세를 잡습니다.
엘리바스의 말이 마음을 서늘하게 합니다. “악한 일만 저지른 자들은 평생 동안 분노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잔인하게 살아온 자들도 죽는 날까지 같은 형벌을 받는다. 들리는 소식이라고는 다 두려운 소식뿐이고, 좀 평안해졌는가 하면 갑자기 파괴하는 자가 들이닥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어디에선가 칼이 목숨을 노리고 있으므로, 흑암에서 벗어나서 도망할 희망마저 가질 수 없다.”(15:20~22)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일반론적으로 엘리바스의 말은 옳습니다. 악인들에게는 인생이 고통이어야 마땅입니다. 하지만 욥의 맥락에서 그의 말은 설명이 부족합니다. 그는 욥이 고통당하는 이유를 ‘악’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욥은 줄곧 자신은 이런 벌을 받을 정도로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항변하며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인생을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생각에서 조금의 오차도 없습니다. 반면 욥은 인생이 단순하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착한 사람도 고난에 처하는 경우가 있고, 악한 이들이 평안하고, 불의한 자가 득세하고 악인이 권세를 누리므로 인생을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엘리바스의 말을 조금 더 살펴봅니다. “비록, 얼굴에 기름이 번지르르 흐르고, 잘 먹어서 배가 나왔어도, 그가 사는 성읍이 곧 폐허가 되고, 사는 집도 폐가가 되어서, 끝내 돌무더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부자가 될 수 없고, 재산은 오래 가지 못하며, 그림자도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15:27~29) 저는 엘리바스의 이 말이 오늘 이 땅에서도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온갖 거짓과 술수로 권력을 잡은 이들에게 엘리바스의 말이 현실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악하고 불의한 이들이 권세를 잡는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엘리바스의 주장이 틀리지는 않지만,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맥락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통받는 욥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친구를 거칠게 몰아붙이기만 할 뿐 위로하는 여유와 겸손의 미덕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잣대로 함부로 욥을 판단하고 정죄하려고만 합니다. 자기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이 엘리바스입니다. 자기 잣대로 남을 재단하는 이가 엘리바스입니다. 자기 잣대는 먼저 자신에게 적용하여야 합니다.
주님, 저도 엘리바스처럼 저의 잣대로 함부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한 적이 있습니다. 뒤늦게나마 후회하고 반성합니다. 같은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다른 이들을 대할 때에 너그러운 마음과 관용의 자세를 잘 견지하겠습니다.
2023. 11. 2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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