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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욥기 16:1~17
함께 신앙을 하는 친구 중에 시인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는 시를 짓지 않는 시인입니다. 저는 그에게서 말의 엄위함과 글의 무게를 읽습니다. 그에게 시를 짓지 않는 이유를 물은 적은 없지만 저는 그가 언어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라고 나름대로 짐작합니다. 그래서 매주 설교하는 저로서는 그 앞에 조심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웅변이 침묵보다 가벼움을 그에게서 느낍니다. 사리에 맞는 말과 경우에 합당한 글이라도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칼은 뽑지 않은 칼입니다.
엘리바스의 두 번째 말에 대한 욥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런 말은 전부터 많이 들었다. 나를 위로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너희는 하나같이 나를 괴롭힐 뿐이다.”(16:2) 엘리바스의 말은 전부터 많이 들은 말,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새롭지도 않고 놀랍지도 않은 말입니다. 도리어 친구 사이를 생경하게 합니다.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원론에 있어서는 틀리지 않지만 고난에 처한 자에게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고통을 가중시킵니다. 이런 말은 아무리 많이 하여도 말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말의 능력이란 위로와 공감과 격려와 희망입니다. 그런데 엘리바스가 하는 말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을 욥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회의가 두 차례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자랑삼았고, 사탄은 인과응보의 논리로 반박하며 욥을 고난에 처하게 하였습니다. 욥은 영문도 모른 채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욥의 말, “주님께서 나를 체포하시고, 주님께서 내 적이 되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라고는, 피골이 상접한 앙상한 모습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나를 치신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피골이 상접한 내 모습을 보고, 내가 지은 죄로 내가 벌을 받았다고 합니다.”(15:8)는 표현을 무지와 교만이 뒤섞인 불경스러운 불신앙이라고 단정하기가 머뭇거려집니다. 하나님을 ‘적’, ‘원수’라고 단언하는 욥의 태도가 지나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천상 회의의 사실을 모르는 욥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 그만큼 답답하였습니다. 물론 욥의 친구들도 천상 회의의 사실을 몰랐습니다. 욥은 모르니까 하나님께 질문하고 반항한데 비하여 욥의 친구들은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였습니다. 지혜문학에서 무지는 악입니다.
인생에는 힘겨운 시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피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피치 못하게 맞닥뜨리기도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가혹한 현실 앞에서 절망의 한숨을 내쉬는 욥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공허한 위로를 기대하지 말며, 쉽게 들을 수 있는 싸구려 말에 상처받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이럴 때일수록 강한 자존감이 필요합니다. 진실에 입각하여 하나님께 끈질기게 질문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셋째는 현재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픔을 숨기는 것이 미덕은 아니며 아픔을 드러내는 일이 불신앙도 아닙니다.
주님, 오늘 교회가 하는 말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그래서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교회만 할 수 있는 말, 위로와 공감과 격려와 희망의 말길이 트이기를 빕니다. 말을 조심하고 꼭 필요한 말에 이르도록 유의하겠습니다.
2023. 11. 2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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