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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하나님 인식
욥기 19:1~29
“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19:4) 욥이 격앙해서 친구들을 향하여 목소리를 높입니다. 위로하러 온 친구들이 도리어 자신을 괴롭히며 모욕적인 언사를 일삼자 친구들에 대한 욥의 감정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허물을 자랑할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란 허물이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대 사도인 바울조차도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 7:24)라며 시공간에 갇혀 죄성을 괴로워하며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였습니다. 오십보백보,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허물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인군자라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된 사람은 끝없이 자신의 허물과 싸웁니다. 양심을 따르고 도덕을 지키며 종교를 통하여 반듯하고 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노력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욥이 기대하는 친구의 모습은 이게 아닙니다. 친구란 허물을 드러내고 죄상을 밝히는 추상같은 검사가 아니라 친구의 허물을 가려주고 동정과 공감의 말로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매사에 칭찬과 동조를 하는 친구의 우정은 의심할 필요가 있더라도 자신의 허물과 결점을 예의 바르게 말해줄 수도 있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친구가 짊어질 삶의 무게도 나누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쉽지 않지만 친구란 ‘두 개의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우정의 무게감을 느끼게 합니다. 욥이 고난에 처하자 과거에 그를 알고 있던 모든 자들이 등을 돌렸습니다.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도 견디기 어려운데 형제들은 떠나고, 친척들은 욥을 잊었습니다. 종들마저 주인을 업신여기고 어린아이들은 조롱하였습니다. 친구들마저 알량한 인과율의 교리로 욥의 인생을 휘저으며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지금 욥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긍휼입니다. “너희는 내 친구들이니, 나를 너무 구박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이 손으로 나를 치셨는데, 어찌하여 너희마저 마치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나를 핍박하느냐? 내 몸이 이 꼴인데도, 아직도 성에 차지 않느냐?”(19:21~22) 욥은 친구들의 예의 바른 우정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나를 궁지로 몰아넣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나를 그물로 덮어씌우신 분도 하나님이시다.”(19:6) “내 영광을 거두어 가시고, 머리에서 면류관을 벗겨 가셨다.”(19:9) 수없이 질문하는 욥에게 한 마디 답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욥은 침묵하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고난을 주셨다고 지목합니다. 희망을 뿌리째 뽑고 군대처럼 욥을 포위한 주체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욥의 하나님 인식이 당돌해 보이지만 틀린 것은 아닙니다. 사랑을 주시는 하나님 인식 대신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욥에게 또 다른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실재가 아니던가요? 그래서일까요? 욥은 하나님께서 고난의 원인을 제공하신 분이라고 자각하는 순간 구원자로 하나님을 모셔 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가 살아 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 위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19:25) 놀라운 역설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욥처럼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을 느끼는 이들도 많습니다. 전쟁의 화마에서 신음하는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의 무고한 시민들에게 긍휼의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합니다.
2023. 11. 2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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