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요6:30-32 |
---|---|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6장 30절-32절: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30절: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인간세계에서는 100% 믿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왜냐? ‘내가 너를 속인다’ 이런 마음으로 속이지 않더라도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전부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정정실, 목숨, 부요성 등등 세상에 대한 믿음은 100% 안 맞는다. 표면적으로는 절반은 맞을지라도 이런 것들은 인격적인 게 아니라서 이런 것을 믿으면 100% 속게 된다. 세월이 자기를 속이고, 시간이 자기를 속이고, 환경이 자기를 속인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것은 믿을 게 없다. 그러나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적 인격적으로 들어가면 하루하루의 현실에 충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진다.
세상을 살면서 사람에게 속는 것은 어떻게 보면 속은 자기에게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자기가 세상에 기준을 놓고 상대를 믿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은 거고, 세상이 변함이 없고 영원한 것으로 믿은 것이기 때문에 상대 이전에 자기에게 문제가 있는 거다. 정치인들이 ‘미래가 어쩌고 저쩌고’ 라고 해도 세상이 인간 자기의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니다. 세상정세는 이리 저리 돈다. 따라서 경제상황도 세상의 정세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경제에 기준을 놓고 사는 사람은 늘 자기의 생각에 자기가 속게 된다.
우리는 자기의 현실이 어떻게 변할지라도 그 환경과 조건에서 변질이 없는 인격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믿어주신다. 이런 사람이 되지 못하면 자꾸 세상으로 갔다가, 현실로 갔다가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나 사람들로부터 못 믿을 사람이 된다. 나중에는 스스로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가게 된다.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물을 활용해서 인간구원의 일을 해 나가시는데, 창세 이후로 세상사람들이 하지 못한 일, 하지 못할 일을 수없이 많이 하셨는데 이것 말고 무엇을 더 보여줘야 믿겠다고 하는 건지? 쉽게 말하면 죽은 자를 살린 거 이상 무엇을 더 보여줘야 믿겠다는 거냐?
또한 맹물로 포도주를 만드셔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주님이라는 것을 보여줬는데 이것 이상 어떻게 더 알게 해 주느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 이것을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했기 때문에 표적을 요구하는 거라면 이들에게 그 장면을 또 보여주면 믿겠느냐? 아니다. 이건 이미 틀린 거다.
만능의 능력자 주님을 믿지 못하고 이런 저런 요구를 하면서 자기들이 믿을 수 있는 일을 자꾸 보여 달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여주시기 위해 이 무리들 중에 몇 명을 죽이면 믿을 수 있을 런지? 그러니까 주님께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은 겁도 없는 말을 하는 거다.
‘예수님, 보여주십시오’ 라고 해서 보여주신다면 좋은 것을 보여주시겠느냐, 지옥 맛을 보여주시겠느냐? 주님께 자꾸 이적 기사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을 보여줄 거라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지 최하의 지옥 맛을 보여 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구약 때와 신약 때를 포함해서 지금까지 수 백, 수천 번 보여주신 주님도 그렇게 생각을 하시겠느냐?
사람이 먹고 마시고 생각하며 사는 게 자기 자유대로 하는 거라고 하겠지만 자기가 가진 생각이 세상 안의 것이라면 이 사람은 세상과 사람에게 필경은 밟힐 수밖에 없는 거다. 세상은 자기가 실력이 없으면 가난이 와서 두들겨 패고, 부자들의 입질로 두들겨 팬다. 영적인 면에서도 믿음이 없으면 세상의 꿈, 가수나 배우나 돈이나 차나 빌딩들이 자기의 머리를 밟고 지나간다. 이렇게 되면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유가 없이 살게 되고 고통 중에 살게 된다.
우리가 물질세계 안에 살면서 자기의 깨달음의 정신 사상이 물질로 들어 있으면 늘 머리가 아프고 염려 걱정 가운데 살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 꿈이 이뤄질지 안 이뤄질지 장담을 못한다. 우리는 이룰구원의 이치로 이런 걸 깨달아야 하겠는데,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세상을 머리에 이고 산다면 이 사람은 캄캄하구나.
주후 70년 9월에 예루살렘의 멸망의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는데 당시에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이 사건이 오리라고 짐작이나 하고 있었을까? 지금의 자기 앞에는 존귀던, 영광이던, 처절이던 그 어떤 사건이 착 착 다가오고 있는 것이니 우리는 이 소리를 미리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자기가 당장 무덤으로 가지 않더라도 시간이 자기를 끌고 무덤 앞으로 자꾸 가고 있고, 또한 그 무덤이 나에게 점점 다가오고 있다. 인간이라면, 특히 이룰구원을 이뤄가는 우리들은 필연적으로 이런 일을 겪어야 할 과정이니 이 과정을 통과하면서 자기가 이룰구원에 힘을 쓴 것만큼 믿음의 실력이 쌓이게 된다.
31절-32절: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무리들이 예수님께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만나를 먹었다’고 말을 했는데, 구약성경대로는 맞는 말이다.
무리들이 이 말을 하는 것은 ‘예수 당신도 지금 하늘로부터 되는 무슨 신비로운 것을 보여주시오’ 라고 하는 거다. 이 무리들은 물질적인 개념으로 눈에 보이는 육에 속한 것을 보여 달라는 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들의 말을 듣고 보여준다면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휘말린 거다. 마귀가 이런 수법을 쓴다.
안 믿는 사람이 예수님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소서’ 라고 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스스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과는 근본적 질적으로 다른 거다. 예수님은 어차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그렇지만 믿음이 없는 형제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하면 안 올라가신다. 예수님은 영적인 구원을 놓고 올라가는 거지만 형제들이 ‘올라가소서’ 라고 하는 소원 목적은 육에 속한 거다. 질이 전혀 다르다. 같은 용어를 써도 뜻이 다른 거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했다. 상대가 말을 할 때 영적으로 말을 하는 건지, 육적인 기준에서 말을 하는 건지 분별을 하고 말을 하라는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은 영적인 개념이 없다. 세상 육적, 물질적, 정신 사상적 소원적 개념이다. 예수님은 한 마디를 해도 천국에 속한 구원에 관한 거다. 따라서 주님을 믿는 우리도 생각하는 모든 게 자타의 구원에 놓은 사고와 소원 목적이라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는 상대가 어떤 기준으로 그 말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영육을 구별하고 듣는 사람은 들은 말을 자기 속에서 정리를 하고 대답을 하게 되지만 이게 없는 사람은 듣는 즉시 말을 해 버리기 때문에 실수를 하게 된다.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이 말은 무리들의 조상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인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애굽을 탈출하여 약속된 땅을 향해 믿음으로 나갈 때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준 것을 말한다. 이 만나는 상징적 계시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바로 왕 밑에 그대로 있으면 이 만나를 먹었겠느냐? 그리고 시내산의 율법도 못 듣는다. 이걸 지금으로 끌어와서 말을 하면 주일에 집에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듣지만 교회에 나오면 듣는다.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들으면 새로운 깨달음의 이치를 주신다. 이게 하늘의 만나다. 이걸 먹어야 믿음이 성장이 되고, 지혜가 성장이 되고, 신적 도덕성이 성장이 된다. 안 나오고 안 들으면 못 자란다.
사람들이 전도를 하면서 ‘교회에 나오시오’ 라고 하는데, 문제는 어떤 위주로 가르치는 교회로 나오라는 건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교회에 나와서 예수 믿읍시다’ 라고 할 때 신비주의던 구복주의던 이질적인 신앙정신이 들어 있는 사람의 전도를 듣고 이질적인 교회로 나가게 되면 이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거다.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이 말은 조상들의 믿음도 모르면서 하늘의 만나를 먹은 조상들처럼 자기들에게도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무슨 신기한 일을 보여 달라는 거다.
이들의 말대로라면 자기의 조상들이 믿음이 좋아서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만나를 먹이셨다는 뜻인데, 조상들은 애굽을 탈출해서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광야생활을 하면서 의심하는 자도 많았고, 반역하는 자도 많았고, 이로 인해 광야에서 다 죽었다. 그리고 가나안을 정탐하라고 열두 명을 보냈는데 정탐을 하고 돌아온 사람 중에 열 명은 부정적인 불신앙의 말을 했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희망적인 믿음의 말을 했다. 그러니 이 무리들이 말하는 대로 자신의 조상들이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어서 살리신 거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살면서 믿음이 있는 자나 없는 자가 다 모세의 설교를 들었다. 그리고 모세가 말한 대로 다음날 아침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는데, 지금도 말씀을 들으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가 깨달아지는 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만나를 먹는 거다. 쉽게 말하면 예수를 먹는 거다. 그런데 같은 말씀을 먹어도 믿음이 있는 두 사람이 먹는 것과, 믿음이 없는 열 사람이 먹는 것은 모든 면에서 다르다. 하늘로부터 내려지는 은혜가 각기 다르다.
예수님 당시의 무리들이 자신들에게 역사적으로나 예수님께서 직접 하늘의 일을 하는 것을 여러 가지로 보여주셨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을 통해 새사람이 되는 이치를 가르쳐 주셨는데도 이 무리들이 자꾸 신비로운 것을 보여 달라고 했던 것처럼 지금의 예수 믿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 느끼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소리다.
예수를 믿는 것은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가 되는 거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 사람에게 역사를 하실 수가 없다. 자기가 자꾸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가 되는 쪽으로 마음이 들어가면 성령님께서 도와주시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은 시험에 걸린다.
우리의 신앙은 어찌하던 올라가야지 내려가서 처박히면 안 된다. 우리교회에서는 다른 교회에서 믿던 식으로 믿으면 얼마 못 가서 자기가 저 밑에 떨어져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때서야 따라 붙으려고 하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자기에게 생명이 여유가 있으면 그렇게 살아봐라.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