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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무지 (욥기 22:1~30)
사람이 행하는 죄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경우라고 대부분 생각합니다.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 하고, 도둑질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성은 그것을 부추깁니다. 그것을 하므로 하지 않았을 때보다 얻는 유익이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성공하는 예가 드뭅니다. 불의의 깊은 뿌리가 세속에 뻗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적당히 거짓말하고, 부정을 저지르며 남을 속입니다. 그런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합니다. 그런데 죄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포함합니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돕지 않으면 죄입니다. 그래서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돕다가 의도하지 않은 위험에 처하더라도 정상참작이나 면책을 받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도 있습니다(우리나라에서는 응급의료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이를 적용합니다).
욥과 친구들의 세 번째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엘리바스가 욥을 비난하며 포문을 엽니다. 그는 욥의 죄를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오히려 네 죄가 많고, 네 죄악이 끝이 없으니, 그러한 것이 아니냐?”(22:5) 친구란 있는 죄도 가려주는 아량과 우정이 있어야 하는데(물론 그런 행위가 무조건 옳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엘리바스는 작심하고 욥을 비난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검찰권이 비난받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동류의 죄는 못 본 척 눈감아 주고 힘이 없거나 눈 밖에 난 자의 사소한 잘못은 침소봉대합니다. 기소권을 갖고 있는 검사의 무소불위한 권력이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시민의 안정과 평화를 위하여 존재하는 공권력이 사유화하는 일은 과거 일부 군인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할 때보다 더 사악하고 집요합니다. 만일 이 나라가 망한다면 그 공로는 검찰에게 있습니다. 시민의 자유와 공공질서를 위해 복무해야 할 자들의 뼈저린 성찰을 요구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행하고, 꼭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았다고 정죄합니다. “네가 까닭 없이 친족의 재산을 압류하고, 옷을 빼앗아 헐벗게 하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물 한 모금도 주지 않고,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22:6~7) 엘리바스는 마치 욥의 행악을 옆에서 본 것처럼 말합니다. 엘리바스의 고발은 거침이 없습니다. “너는 권세를 이용하여 땅을 차지하고, 지위를 이용하여 이 땅에서 거들먹거리면서 살았다. 너는 과부들을 빈 손으로 돌려보내고, 고아들을 혹사하고 학대하였다. 그러기에 이제 네가 온갖 올무에 걸려 들고, 공포에 사로잡힌 것이다.”(22:8~10) 이 정도로 정죄하는 자는 친구가 아니라 적입니다. 만일 엘리바스가 욥이 고난 당하는 이유, 즉 천상회의에서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대화를 안다면 얼마나 부끄러울까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될 것입니다. 차라리 모르는 게 약입니다. 모르니까 용감합니다. 모르니까 겁이 없습니다. 모르면서 하는 말이 가장 무섭습니다. 종교도 정치도 그렇습니다.
모르면 겸손해야 합니다.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는 일은 교만입니다. 자신의 무지를 아는 일이 지혜의 첫걸음입니다. 그런데 무지한 사람일수록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지하면서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권세를 잡으면 세상의 평화는 위기를 만나고, 정의는 왜곡되고 시민의 자유는 위험해집니다. 그래서 무지는 죄입니다. 엘리바스의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주님, 무지한 자들일수록 뻔뻔하고 당돌합니다. 책 한 권 읽은 자들이 가장 무섭습니다. 얕은 지식과 척박한 지혜를 가진 자들이 신념에 불타오를 때가 위기입니다. 정치도, 종교도, 저도 그렇습니다.
2023. 11. 2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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