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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혀질 수 없는 생각
욥기 23:1~17
사람의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엘리바스는 세 번째 말을 하면서도 그 기저는 처음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사실은 다른 친구들이나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욥과 친구들의 생각은 좁혀지지 않고 더 고착화되고 있습니다. 편향적 확신에 찬 이들이 대화를 통해 각자의 생각이 유연해지거나 그 지향에서 중간 지대를 공유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욥의 친구들에게 ‘규범적 지혜. 그 너머를 보라’는 권면은 비상식에 불과하며, 욥에게 ‘보편적이지도 않은 성찰적 지혜를 버리라’는 것 역시 일종의 고문입니다. 엘리바스의 규범적 지혜와 욥의 성찰적 지혜는 평행선을 이룹니다. 굳이 합해질 필요는 없지만 오늘 저희는 과연 어떤 길을 택하여야 할까요?
“오늘도 이렇게 처절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니! 내가 받는 이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그분이 무거운 손으로 여전히 나를 억누르시는구나!”(23:1) 욥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알 수 없는 이유가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자신은 이런 벌을 받을 만큼 인생을 헛살지 않았다고 자신하였습니다. 자기 의를 자랑하며 잘난 체하지 않았고 남을 업신여기지도 않았습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며 그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12). 자신을 돌아보며 어긋날 길을 걷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자녀들에게도 오롯이 그 길 걷기를 재촉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욥이 완벽한 의인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느 인생이 감히 의인이라고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욥은 자신이 비록 완벽한 의인은 아니지만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주체는 하나님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욥은 간절합니다. “그분의 보좌까지 내가 이를 수만 있다면,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 그러면 그분은 무슨 말로 내게 대답하실까? 내게 어떻게 대답하실까?”(23:3~5) 욥은 고난의 이유를 알고 싶어하였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알 수 없는 이유를 찾고자 갈망하는 욥의 질문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학’에서 풀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닥친 이유 없는 고난이 시간과 공간에 갇혀 산 인류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경천동지할, 인류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실을 욥이 이해하기에는 아직 일렀습니다. 이 사실을 인지한 베드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벧전 3:17)이라고 했고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라고 말합니다.
의인이 고난받는 일을 세속사에서는 설명할 수 없어 보이지만 구속사에서는 지극히 당연합니다. 구속사에서 고난은 하나님의 규범적 지혜 차원의 징계가 아니라 죄인 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필수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이유 없는 십자가 고난이 없었다면 인류는 아직도 절망의 심연을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알 수 없는 이유로 고난 당할 때 항변하고 질문하는 일은 불신앙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기대감의 표현입니다. 지금 그런 처지에 있는 이들이 있다면 좀 더 당당해지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무고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견딜 힘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 저희는 세상을 바꾸고 싶지만 사실 자기 생각 하나도 쉽게 바꾸지 못하는 철없는 존재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에 접촉될 때 전인적 변화가 일어나게 해주십시오. 욥의 인내를 주십시오.
2023. 11. 29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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