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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구더기가 아닙니다
욥기 25:1~26:14
“하나님께는 주권과 위엄이 있으시다. 그분은 하늘나라에서 평화를 이루셨다. 그분이 거느리시는 군대를 헤아릴 자가 누구냐? 하나님의 빛이 가서 닿지 않는 곳이 어디에 있느냐?”(25:2~3) 수아 사람 빌닷의 세 번째 말입니다. 지극히 합당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류에 대하여 절대주권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공포와 평화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이미 욥도 하나님의 주권을 누누이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빌닷이 다시 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욥을 비난하기 위함이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리를 주장하고 강조하는 이유가 친구를 골탕 먹이기 위함이라면 그 진의가 불순합니다. 어떤 옳은 말이 진리로 인정받으려면 화자의 진정성도 입증되어야 합니다. 맥락 없이 하는 좋은 말이 언제 어디서나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진리를 도구 삼아 삶을 잇는 이들이 꼭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빌닷은 사람을 ‘벌레와 구더기’에 비유합니다(6). 이 역시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이렇게 말하는 빌닷의 저의가 불순합니다. 사실 빌닷은 욥을 향하여 ‘벌레와 두더기’라고 욕을 하는 셈입니다. 이런 모욕적 언사를 들을 정도로 욥이 형편없이 어그러진 삶을 살았을까요? 단지 생각과 관점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런 모욕적 언사를 퍼부어도 되는 걸까요? 그런데 이런 일들이 우리 시대에도 너무 흔하게 일어납니다. 학문하는 방법의 차이, 또는 정치적 지향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모욕적 언사를 서슴치 않습니다. 상대를 함부로 단정하는 태도는 인격 모욕일 뿐만 아니라 신성모독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직접 빚어 만드시고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산 사람이 된 존재에게 ‘벌레요, 구더기요’ 하는 일은 사람에 대한 비하이자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은 아닌지 의심합니다.
빌닷의 말을 들은 욥이 반문합니다. “너는 우둔한 나를 잘 깨우쳐 주었고, 네 지혜를 내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누가, 네가 한 그런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누구에게 영감을 받아서 그런 말을 하는거냐?”(26:3~4)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러 왔지만, 욥은 그들로부터 위로는커녕 고통과 비애의 무게를 더할 뿐입니다. 욥보다 하나님을 모르면서 더 잘 아는 것처럼 착각하는 친구들의 말을 듣는 일이 욥에게는 고역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신학교에서 남의 학문을 조금 맛본 자들이 하늘의 비밀을 다 깨우친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평생을 써먹는 모습은 가관입니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평신도를 갈라놓고 평신도는 평생 배우는 존재라고 착각하게 하는 자들의 무지는 너무 용감해서 측은하기까지 합니다.
신앙이란 첫째로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을 단정적으로, 규범적 지혜에 입각하여 설명하지만, 욥은 불가해한 분, 질서의 세계를 다스리면서도 질서 너머의 세계도 통치하시는, 사람의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 이해합니다. 둘째로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에서 신론도 중요하지만, 더 우선할 일은 신앙의 주체인 인간론입니다. 신앙하는 사람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신앙은 왜곡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창조의 걸작이며,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의 대상입니다. 함부로 비하하거나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건강한 신앙이란 하나님을 바로 알 뿐 아니라 사람도 제대로 이해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주님, 착각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무지입니다. 책 몇 권 읽은 것으로 잘난 척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공부, 사람 공부 착실히 하겠습니다.
2023. 12. 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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