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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세계
욥기 27:1~23
욥은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와 고난 당하는 자신을 위로하러 왔는데 위로는커녕 압박만 하고 있으니 아니 온 만 못하고 없느니만 못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괴로운 인생 여정에 친구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가중하는 일이 어찌 욥에게만 있는 일이겠습니까? 어쩌다 형통하면 친구라는 이름으로 시샘하고, 어쩌다 나락에 떨어지면 친구라는 이름으로 비웃고, 자기 잣대로 남의 삶을 마음대로 재단하여 콩 놔라 팥 놔라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모든 잘못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칼을 드는 사람들 앞에서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속으로 삭이기만 한다면, 세상만사 그렇고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해 버린다면, 그래도 몇 안 되는 친구이니 그 말 거절할 수 없어 응대하며 참기만 한다면… 우정은 겨우 유지될지 몰라도 진실이 빠졌으니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합니다. 그 우정은 허명무실할 뿐입니다. 적어도 우정과 관련하여 욥은 고분고분하고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말도 되지 않는 친구의 논리를 면전에서 공박하는 싸움닭입니다. 좁혀질 수 없는 평행선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하나님의 꾸중을 들을 때 두말하지 않고 과감하게 돌이키는 것(욥의 친구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너그러움으로 용서하는 일입니다(42:7~9), 있어도 크게 유익하지 않고, 없어도 무방한 이들을 친구라고 부르는 처량한 현실을 개탄합니다. 뒷골목 불량배의 의리조차 찾을 수 없는 이들에게 기대할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습니까? ‘뚝배기보다 장맛’ 같은 우정은 흔치 않습니다. 보물이 다 그렇듯 개똥처럼 흔하면 그게 보물이겠습니까?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도 있기는 합니다만.
욥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렇게 혹독하게 대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다. 그분께서 나를 공정한 판결을 받지 못하게 하시며,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 괴롭게 하신다.”(27:2)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완전히 버리시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욥은 다짐합니다. “내가 입술로 결코 악한 말을 하지 않으며, 내가 혀로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나는 결코 너희가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죽기까지 내 결백을 주장하겠다. 내가 의롭다고 주장하면서 끝까지 굽히지 않아도, 내 평생에 양심에 꺼림칙한 날은 없을 것이다.”(27:4~6) 모순처럼 보입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고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신앙을 포기하거나 하나님께 대항할 법도 한데 욥은 끝까지 신앙 준수를 다짐합니다.
믿음의 세계란 그렇습니다. 이는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가 자신을 야단치는 어머니 품에 달려가 안기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때로 역행하면서도 눈 하나는 늘 뒤를 돌아보기 마련입니다. 죄책이 자신에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가해지는 불공정한 고통 앞에 선 욥 역시 그렇습니다. 신앙이란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옳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맹목적이거나 미신은 더더욱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께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인과율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욥은 자신을 때리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우러러봅니다.
주님, 우정이란 친구를 끝까지 믿어 주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을 유지하겠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은 무조건 옳다는 전적 신뢰입니다. 좋은 우정, 멋진 믿음을 견지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늘 도와주십시오.
2023. 12. 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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