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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욥기 30:1~15
인생이 의식하는 시제는 현재뿐입니다. 현재란 과거의 필연적인 산물이며 미래의 원인입니다. 오늘의 선택이 내일을 결정합니다. 오늘을 잃으면 모든 시제를 놓치게 됩니다. 현재가 없으면 영원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다음에 죽어서 갈 천당이 아니라 믿음으로 경험한 천국의 가치인 평화와 자유와 정의의 질서를 지금 여기서 살아내는 행위를 통하여 실현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가 실현되는 곳입니다.
욥은 29장에서 어제의 호시절을 회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신 덕분에 삶은 안정되었습니다. 욥은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기꺼이 그들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없이 욥을 존경했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앞장의 호시절을 부정하는 접속 부사 ‘그런데(그러나)’를 통하여 어제의 추억들에 반전되는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어제가 좋았던 사람들은 오늘도 좋기를 바라고 내일도 그런 날이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그리고’, ‘그러므로’ 등 긍정의 접속 부사로 이어지는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반면 어제의 삶이 버거웠던 이들은 새로운 삶을 꿈꿉니다. 그런 인생은 ‘그러나’ 같은 과거를 부정하는 접속 부사를 요구합니다.
욥은 어제의 즐거웠던 기억이 오늘 이어지지 않고 있음을 슬퍼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보다 어린 것들까지 나를 조롱하는구나. 내 양 떼를 지키는 개들 축에도 끼지 못하는 쓸모가 없는 자들의 자식들까지 나를 조롱한다.”(30:1)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설명할 수 없는 고통 앞에 선 욥의 심정이 그대로 표현됩니다. 대등한 힘과 힘이 당당하게 겨루어 한쪽이 패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이기지는 못했지만, 그 패배를 치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음에 더 잘하면 됩니다. 그런데 깜냥도 안되는 상대에게 무시당하고 조롱거리가 된다면 그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마치 산중 왕 호랑이가 여우들에게 농락당하는 꼴입니다. 지금 욥의 심정이 그랬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욥은 그 사회로부터 신망이 두터운 사람으로서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스스로 권위를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그를 존경해 마지않았습니다. 특히 욥은 그 사회의 약자들에게 아낌없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 분수를 잊은 채 욥을 조롱하고 미워하고 침을 뱉으며 놀립니다. 죽은 짐승을 뜯어먹는 하이에나 같은 무리입니다. 욥은 스스로 자신의 위신과 인격을 지킬 힘이 없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욥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욥처럼 난처하고 딱한 처지에 내몰려 고생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평생 가난한 자들을 위해 헌신한 자를 뇌물죄로 엮어 모욕을 주기도 하고, 평생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위해 살아온 이를 이중인격자로 몰아 하루아침에 파렴치범으로 몰아 인격 살인을 합니다. 이런 지경에 처한 의인들이 욥처럼 잘 버틸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이 내 활시위를 풀어 버리시고, 나를 이렇게 무기력하게 하시니, 그들이 고삐 풀린 말처럼 내 앞에서 날뛴다.”(30:11) 욥은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주도하신다고 판단하고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부당한 고난을 받으며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는 상황인데도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십니다. 욥이 절규합니다. “그들은 내가 도망 가는 길마저 막아 버렸다. 그들이 나를 파멸시키려고 하는데도, 그들을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30:13)
주님, 욥처럼 이유 없이 고난받고 있는 이들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욥처럼 인내하게 하시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날을 앞당겨 주십시오. 스스로 낙심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2023. 12. 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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