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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
욥기 30:16~31
<욥기>를 읽으며 드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욥의 절망에 공감하며 드는 안타까움입니다. 악인에게나 마땅한 삶이 왜 의인에게 허락되어야 합니까? 의인이 악인이 받아야 할 벌을 받는 일이 과연 정의로우신 하나님과 어떻게 조화됩니까? 하나님의 정의로움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 세상은 한술 더 떠서 악인이 의인의 공을 가로채는 일이 너무 잦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못나고 못된 놈이 분수를 모르고 깝치고 있습니다. 숭어가 뛰니까 망둥이도 뛰는 격입니다. 평생 힘을 숭배하며 파렴치하게 살아온 이들이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편을 들어주는 이들에게 징계의 칼날을 들이대는 어처구니없는 세상입니다. 악을 소탕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악마가 된 이들이 세상을 호령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의로운 이들이 권세를 잡는 일이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배반하는 일일까요? 조금 덜 악한 자들이 주도하는 세상은 언제나 가능할까요? 그런 기대가 무색한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님의 침묵이 멈출 날은 언제인가요?
욥은 인생이 겪을 수 있는 최고치의 고통에 도달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픔을 애써 감추지 않습니다. “나는 이제 기력이 쇠하여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나는 괴로운 나날들에 사로잡혀서, 편하게 쉬지 못하였다.”(30:16)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진흙 속에 던지시니, 내가 진흙이나 쓰레기보다 나을 것이 없다.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어도, 주님께서는 내게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주님께 기도해도, 주님께서는 들은 체도 않으십니다.”(30:19~20) 욥에게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십니다. 가련한 인생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과 모욕에 이르게 하십니다. 아무리 질문하여도 하나님은 침묵만 하십니다. 욥이 그동안 어그러진 삶을 살았다면 그 때문이려니 수긍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고난받는 사람을 보면 함께 울었고, 궁핍한 사람을 보면 함께 마음 아파하였습니다. 욥은 빛을 향하여 살았는데 하나님은 어둠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욥은 통곡하여 울부짖습니다. 그런데 그의 탄식과 절규를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께 고난의 이유를 묻지 않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의당 ‘이유가 뭡니까?’, ‘나를 이렇게 치시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물어야 이치에 맞습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고는 하지만 ‘왜 이러십니까?’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욥은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이유가 있어서 주신 것도 아니며, 이유가 있어서 거두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누구에게 좋은 것을, 또는 나쁜 것을 주시는 자기 의지의 절대주권을 가진 분이십니다. 욥은 그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규범적 지혜를 초월해 있는 성찰적 지혜의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품을 수 없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선대 할 수도, 또는 고통을 줄 수 있지만 욥은 그 하나님을 외면하거나 거부할 수 없습니다. 욥의 최선이 하나님의 최악으로 돌아오더라도 욥은 배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신앙이야 말로 숙명적입니다.
주님, 의인이 고통 당할 때 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악인이 번성하고, 악인의 사고방식이 편만해질 때 주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세상이 전쟁과 증오로 불탈 때 주님은 어디에 계시고 주님의 백성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2023. 12. 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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