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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젊은이
욥기 32:1~22
고구려 때에 박판서라는 재상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늙고 병든 사람을 산에다 버리는 고려장 풍습이 있었습니다. 박판서도 시류를 거스를 수 없어 늙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깊은 산속을 가는데 어머니가 솔가지를 꺾어 길에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돌아가는 길 첩첩산중에 길을 잃고 헤멜 아들을 염려한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한 박판서는 다시 어머니를 업고 돌아와 몰래 봉양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시인 김형영의 <따뜻한 봄날>로 다듬어졌고 소리꾼 장사익이 <꽃구경>으로 불러 그 시대의 비정함과 애절함에 장탄식을 자아내게 합니다. 한번은 당나라 사신이 고구려에 오면서 똑같이 생긴 말 두 필을 끌고 와서 어미와 새끼를 가려내라고 조정을 압박하였습니다. 왕과 신하들은 당나라의 등쌀에 분해하면서도 답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했습니다. 박판서의 어머니가 아들이 고민하는 이유를 듣고 지혜를 일러 주었습니다. “노인에게 그런 문제는 식은 죽 먹기란다. 말을 하루쯤 굶긴 후에 여물을 가져다주어라. 먼저 먹는 놈이 새끼 말이 분명하다. 어미란 새끼를 배불리 먹이고 나중에 먹는다.” 그렇게 하여 당나라 사신은 머쓱해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후 박판서는 임금님에게 고려장 철폐를 진언하여 악습이 철폐되었습니다.
백발은 영화로운 면류관(잠 16:31)으로서 인생 경험이 축적된 지혜는 배워서 얻는 지식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래서 노인 한 명이 사라지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도 있습니다. 나이가 드는 일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재앙은 아닙니다. 젊음은 욕망의 지배를 받고, 장년은 이해타산에 휩싸이지만, 노인은 지혜에 이릅니다.
이제까지 <욥기>는 욥을 단죄하여 ‘너는 죄인이다. 회개하여 살 길을 찾으라’는 친구들의 말과 ‘나는 무죄하다’며 친구들의 말을 거부하는 욥의 이야기입니다. 친구들은 설령 욥이 죄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원죄적 결함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부당하지 않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욥은 자신이 받는 고난이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이며 자신은 이런 징계에 이를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항변하였습니다. 욥과 친구들의 주장은 좀처럼 좁혀질 수 없는 평행선만 긋고 있었습니다.
이때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그는 친구들 가운데에 가장 나이가 어려서 대화에 끼어들기가 머뭇거렸던 모양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많아진다고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며, 나이를 많이 먹는다고 시비를 더 잘 가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32:9) 그의 말은 오늘 우리 시대의 노인 된 이들이 새겨들을 부분입니다. 지혜는 없고 노욕만 가득하지는 않은지, 사랑과 용서는 없고 혈기와 증오심만 분기충천하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미래 세대의 길을 열어주기는커녕 그들의 살길을 막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따져보고 성찰해야 합니다. 늙기도 서러운데 추하기까지 해서야 되겠습니까? 엘리후는 먼저 욥에게 분노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2). 이어서 엘리후는 욥의 친구들에게도 분노합니다. 욥을 정죄하려고만 하였지 욥의 결백 주장을 반박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할 말이 없으면서도 자리만 지키는 그들을 보는 엘리후는 속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고, 말을 참을 수도 없습니다”(32:18)며 입을 열었습니다. 그는 매우 객관적인 사람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엘리후는 자신의 주장에 진실을 담기보다 전통주의의 흐릿한 후광을 강조하며 사명감을 과장하는 듯합니다. 물리적 나이가 젊다고 생각도 젊은 것은 아닙니다. 늙은 애도 많습니다.
주님, 지혜 대신 노욕을 택한 노인들이 많아 보기 민망합니다. 그런가 하면 객관이라는 명분으로 문제를 더 꼬이게 하는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겸손한 척하면서 겸손하지 않은 자들을 보며 옷깃을 여밉니다.
2023. 12. 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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