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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6:34-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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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6장 34절-35절: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4절: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무리들이 이 말을 영적인 면으로 하는 건지, 육적인 면으로 하는 건지? 육적 물질적인 생각으로 말을 하는 거다. 세상사람들은 자기의 현실이 행복하면 ‘영원히 이렇게 살고 싶다’ 라고 하는데 이건 육의 생각이다. 물질적인 개념이다. 그러니까 물질에 매여 있는 의미로 ‘영원히’ 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령천국의 ‘영원히’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실존세계인 천국에서 오셨기 때문에 이 나라를 염두에 두고 ‘영원히’ 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의사성과 실상세계에 대해 알지 못하면, 그리고 성경의 문자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내 정신으로 삼지 않으면 이 사람이 아무리 성경구절을 들어서 말을 해도 그 사고방식은 땅에, 물질에 속한 거다. 우리는 이것을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고 저떻고’ 라고 말을 할지라도 현실이 자기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자기 속에 든 세상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은 어떤 사건과 상황에 부딪혀도 변질이 없다. 영원한 것에 대한 믿음이 한결같다.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떡에 대한 말씀을 듣고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라고 한 거다. 이들의 말을 들으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참 생명의 떡을 항상 먹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는 것으로 들려서 옳은 말 같지만 이 말 후에 예수님의 말씀 끝에 그들의 반응을 보면 먹으면 세상에서 영원히 죽지 않는 떡을 구하는 거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는 사람이 거듭나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거듭난 사람은 사는 것이, 믿는 것이 크고 작은 사건과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면으로 소원이 들어 있고,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자타의 이룰구원에 활용을 한다.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 생명의 떡의 의미를 영적으로 알아듣지 못하고 일반적인 육의 생각으로 알고 있다. 이들은 세상에 속한 만족을 채워달라는 정신의 신앙이다. 이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형벌에 해당이 되는 육적이며, 옛사람 부패성적이며, 세상적이며, 마귀적인 신앙의 질이다. 말세가 된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하나의 종교적인 신앙들이다.
광야에서 생명의 양식을 먹은 자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해서 광야로 나와서 가나안을 향해 가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본문에서 무리들이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라고 하는 것은 과거 애굽을 탈출해서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면서 만나를 먹었던 조상들의 신앙정신은 모른 채 육신의 배를 채워주는 떡을 먹게 해 달라는 거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런 무리적 혼합적인 정신을 가진 자들이 많다.
3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게 예수 믿는 건데,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이 맛을 보려면 교훈이 구별 분별이 되어야 한다. 교훈이 구별 분별이 되면 ‘이 교회는 무엇을 먹이는 교회로구나. 이 교회는 먹지 못할 독극물을 먹이는 교회로구나. 이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그대로 먹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안다.
생명의 떡이 아니면 이 외에는 그 어떤 것이라도 전부가 나타나는 모양만 다르다 뿐이지 세상에 속한 거다. 생명의 떡은 하나다. 그러나 세상의 떡은 다양하다. 하나의 떡이 모양을 다르게 하기도 하고, 모양은 같은데 각이한 맛도 있다.
구약 때 이스라엘이 하늘로부터 내린 만나를 먹은 것과, 신약 때 광야에서 예수님의 이적의 떡을 먹은 것은 모두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이다. 그러니 믿는 사람은 이 떡을 부지런히 먹어야 한다. 아무리 몸이 아파도 숨을 쉬는 사람은 산다. 그러나 아무리 건강해도 숨을 안 쉬는 사람은 죽는다. 요셉 때 애굽의 창고에 아무리 곡식이 풍부해도 입을 다물고 있는 쥐는 굶어죽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죽지 않는 살아 있는 하늘의 양식이다. 예수님은 참 생명의 생명수로서 다함이 없는 양식이다. 어느 정도 나오다가 끊어지면 생명수가 아니다. 옳은 진리이치의 사상을 붙들고 있는 사람은 성경을 연구할 때 영적인 이치가 자꾸 나온다. 그러나 세상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 자꾸 인간의 지식과 수단이 나오게 된다. 이건 생명수가 아니다.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이치적인 정신 사상, 즉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영원에 해당되는 면이 없다. 그러니 ‘일 크게 하자. 돈 많이 모아서 종교적 활동을 크게 하자’ 하는 쪽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세상적으로 흐르는 교회가 물질을 쓰는 것과, 진리성도들이 물질을 쓰는 것은 그 정신이 다르다. 자타의 구원을 위해 물질을 쓰는 것에는 영생이 들어 있다.
예수님은 참 생명의 떡이요, 한 명이던 백 명이던 온 세상사람이던 모자람이 없이 줄 수 있는 떡이다. 그리고 말씀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한 말씀의 이치를 가지고 각자의 수준에서 깨닫는 대로 다양한 맛을 느낀다. 다양하다고 해서 이질로 나가게 되면 이 사람의 깨달음은 하나님과 끊어진다. 말씀을 주는 목사가 하나님과 끊어지는 말을 줄 수도 있고, 목사는 생명적인 말씀을 주는데 듣는 입장에서 세상성으로 받아들여서 하나님과 끊어지는 경우도 있다. 분문의 무리들이 예수님 앞에서 그랬다.
주님이 주시려는 떡과, 유대인들이 바라는 떡은 질이 다르다. 주님이 주시는 떡은 모자람이 없기 때문에 광야에서 먹고도 열두 바구니와 일곱 광주리가 남은 거다. 물론 그 때 열두 바구니와 일곱 광주리의 떡이 남은 거지만 이것을 정신 사상적 계시로 보면 지금도 주님이 주시는 떡은 모든 사람이 먹고도 계속 남는다. 다함이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어느 시대에 어느 종을 통해서 말씀을 듣던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진 구원에 뿌리를 박고 나오는 사상은 다함이 없고 계속 영생수로 흐른다. 그러나 ‘예수 믿고 부자가 되자’ 라고 하는 설교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뿌리를 박고 나온 질이 아니다.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깨닫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근거를 찾는 거고, 근원을 찾는 거다. 이것을 찾아서 이것을 잡고 신앙을 해야 자기의 믿음이 커지고, 은혜를 받고, 자기가 사는 거다. 자기의 모든 소원 목적이 여기에 들어 있으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라. 성령의 사람이라. 그리스도인이라. 보배 같은 사람이다.
떡이 모자람이 없이 날마다 내려진다는 것은 날마다 새 것으로 나오는 떡이라는 거고 주님께서 주시는 떡은 날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에 다함이 없다. 날마다 모자람이 없이 풍부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언행심사 전부가 생명의 떡이다. 버릴 것이 없다. 주님의 언행심사는 우리의 이룰구원에 하나도 버릴 게 없다. 전부가 영생계로 들어갈 수 있는 성장의 양식이요, 힘도 들어 있고, 지혜도 들어 있고, 능력도 들어 있다. 전부는 안 죽고 사는 것이요 살리는 것으로 들어 있다. 이것을 깨달아서 내 것으로 만들어만 놓으면 죽는 게 없다. 나에게서 사망성이 생기지 않는다. 죽을 정신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신앙성이 사는 정신이 되면 말씀의 이치가 솟아나온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내게 오는 자’ 란 예수님께 오는 자를 말하는데, 그냥 유형교회에 나오는 것을 예수님께 오는 것으로 알면 교회에 나와서 거짓 종이나 이단자들에게 속기 쉽다. 유형교회 안에는 거짓 인도자나 이단자가 많다. ‘내게 오는 자’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나오는 자를 말한다. 즉 세상만족을 채워달라는 게 아니라 참 생명을 얻고자 예수님께로 나온 사람을 말한다. 이것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과는 다른 거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도 살리고, 병든 자도 고치고, 38병자도 고치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이 먹고도 남게 하셨고, 풍랑이 센 바다 위로 걸어오셨고, 풍랑을 잔잔케도 하셨는데, 이런 게 다 당신이 성도의 구원을 위해 일을 하셨다는 증거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분을 모르고 어디에 신경을 쓰고 의지를 하고 있느냐?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주님께 나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말이 물질부자가 된다는 거냐? 이건 굳이 말할 게 없고 지혜지식적으로 고차원적으로 풍부해진다는 거다. 그러니 복된 사람이다. 우리는 주님께 나오는 자는, 즉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나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게 하겠다고 하신 약속을 확실히 믿는다. 참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에게는 영적인 면의 배고픔이나 곤고나 기근을 당하지 않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확실히 믿는다. 반면에 세상부요의 만족을 얻고자 하는 자에게는 이 약속이 없다.
이런 게 있기 때문에 우리가 참 주님을 찾아야 하고, 참 교회를 찾아야 하고, 참 목사를 찾아야 하고, 참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를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교회는 성령의 열매가 없다. 수십 년을 이런 교회에 다니면서 열심히 충성봉사를 해도 사람이 달라지는 게 없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만들어지고, 구별 분별하는 게 있어야 하는데 이게 없다. 그러니 맨날 충성봉사로만 나간다. 그러니 사기꾼 목사가 이용해 먹기가 얼마나 좋겠느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약속이 자기 속에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따져봐라. 지금 예수 믿는 자기가 영적인 면에 주린 건지, 물질 면에 주린 건지를 모른다면 예수 헛 믿은 거다. 이러면 죽도록 믿어도 주님의 약속은 없다. 이게 자기 신앙의 현실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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