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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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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75033 |
설교보기 : https://youtu.be/1WDz_KelI3Y
성경본문 : 로마서 5:1~8
성령과 하나님 사랑
성령강림후 셋째 주일, 2023년 6월18일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성경 본문을 읽을 때마다 특별한 느낌을 경험합니다. 마치 중학생이 하이데거의 책을 읽는 느낌, 또는 아마추어 산악인이 5천 미터 이상 높은 산에 올라간 느낌, 또는 동네 테니스 동호회원이 프랑스오픈 테니스 결승전을 현장에서 직관하는 느낌입니다. 완전히 차원이 다른 세계로 들어왔다는 놀라움과 당혹스러움과 낯섦과 신비로움이 혼재된 느낌입니다. 이런 느낌의 실체가 무엇인지가 오늘 설교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음
롬 5:1~8절은 분량으로 볼 때 짧지만 그 내용은 따라가기 숨 가쁠 정도로 엄청납니다. 첫 문장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이고 마지막 문장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입니다. 이 두 문장 사이에 다음과 같은 단어가 이어집니다. 화평, 은혜, 하나님의 영광, 환난, 인내, 연단, 소망, 성령, 하나님의 사랑, 경건, 의인, 선인, 죄인이 그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라서 대충 알아들을 수는 있습니다. 이런 단어와 문장이 실제로 무슨 뜻인지를 알려면 상당한 수고가 필요합니다. 각각의 단어와 문장에는 일상을 넘어서는 고유한 영적인 깊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에 쫓겨서 정신이 없거나 그리스도교 신앙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한쪽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내 보냅니다.
우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라는 문장을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에 와서 세례받고 예배드린다고 해서 의로워지는 건 아니겠지요.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도덕적이고 더 윤리적이고 더 양심적이며 더 인격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살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만 아무리 애를 써도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도덕적일 뿐입니다. 사회 규칙을 조금 더 잘 지키고, 세금을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양심적으로 냅니다. 그러나 아무도 질적으로 다른 절대적인 의로움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착하게 사는 것으로 자기 인생을 완성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5천만 원 연봉을 받는 사람과 6천만 원 연봉을 받는 사람 사이에 그것만으로 행복한 삶에서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의로움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지려고 노력해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야 의로워지는 겁니다. 우리는 무엇이 의로운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어떻게 교육하는 게 의로운 결과를 맺을지 누가 압니까. 우리가 사는 문명사회를 보십시오. 문명사회는 법에 기초합니다. 문명사회가 늘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법을 고급스럽게 만들어도 정의로운 세상이 되지 못합니다.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원래 비인격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의로움의 실체를 다 알지 못하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법이 미비해서가 아니라 삶의 본질은 무시하고 모든 걸 법으로 해결하려는 데에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대통령이 검찰총장 출신이라서 그런지 점점 더 법 과잉의 세상이 되어갑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은 다른 게 아니라 곧 의로움의 주체이신 하나님과 결속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결속을 가리켜서 오늘 성경 본문 1절은 ‘하나님과의 평화’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려면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곧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라는 문장의 의미입니다. 결국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라는 말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는 말은 똑같은 의미입니다. 바울의 이런 진술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정확하게 천명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라는 말이 관념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궁극적인 생명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자유나 기쁨으로 이름 붙여도 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말은 생명을 풍요롭게 누리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기는 가난하고 외롭고 건강하지 못해서 생명의 풍요로움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런 삶이 얼마나 고단할지는 저도 압니다. 부자로 살고, 가족과 친구도 많고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는 걸 저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우 여러분도 재미있게 살면 좋습니다. 그러나 재미있게 살만한 형편이 안 되어도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3~4절에서 환난이 희망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에게는 가난과 외로움과 질병 등으로 인한 환난 가운데서도 결국에는 희망에 이르게 한다는 바울의 말이 설득력이 있을까요? 여기서 희망은 새로운 삶을 향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십시오. 그들 중에서 불법 체류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환난을 겪는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불안합니다. 그래도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이 있는 분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희망이 얼마나 참된 것이냐에 달려 있겠지요. 바울은 그 희망을 5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라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기에 비록 이 세상에서 환난을 겪더라도 희망의 삶을 놓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이 관건입니다. 우리가 말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 사랑을 영혼 충만하게 느끼는 일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모습은 사랑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작은 일에도 섭섭하고, 외롭고, 신경과민이 됩니다. 약간만 손해를 당해도 억울해합니다. 세상에서 그런 방식으로만 삶을 경험했기에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질적으로 느끼기는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좁은 문’을 말씀하셨는지 모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좁은 길이지만 그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고, 우리도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나요? 사랑을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일도 종종 일어납니다. 난폭한 남편이 자기의 잘못을 빌면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거야.”라고 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 되나요.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그런 말을 자주 합니다. 공부에 소질과 능력이 없는 자녀에게 억지로 공부를 강요하면서 “엄마가 너를 사랑해서 그런 거야. 너 잘되라고 잔소리하는 거란다.”라고 핑계를 대는 경우도 많습니다. 엄마가 일부러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라 그걸 사랑이라고 당연시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능력이 본래 없으니 누구를 ‘사랑한다.’라고 말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는지요.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사랑을 말합니다. 그중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우리가 아는 사랑은 자기 소유를 포기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희생인데, 바울은 그것과 사랑을 구분합니다. 자기희생은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은 사랑 없이도 자기를 희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명예심과 교만한 마음으로 자기를 희생할 줄 압니다.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받으려고 자기 소유를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서 고전 13:2절에서 예언과 비밀스러운 지식과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사랑이 없으면 무의미하다고 끊어서 말했습니다. 사랑은 온전히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관통하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랑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걸 하나님께 감사해하고 찬양할 뿐입니다.
칼 라너는 『기도의 절실함과 그 축복에 대하여』 3장 ‘사랑의 기도’ 항목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영적인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런 사랑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영혼의 사심 없는 황홀한 몰입입니다.”(75쪽) “자기 자신을 잊는 가운데 이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라붙어 있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며,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보고 스스로 행복해합니다.”(75쪽)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자신이 축소됩니다. 자기가 없어지면서 오히려 평안해집니다. ‘빅뱅’이나 138억 년이라는 우주의 시간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어떤 감정과 비슷합니다. 자기 소멸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이를 칼 라너는 ‘몰아적 황홀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게 과연 가능한 말일까요? 우리는 세상에서 늘 자기와 자아에 전념하고 그걸 즐기라는 요구를 받고 살지 않습니까. 어떻게 자기가 없어지는 영적 황홀감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까?
성령의 도우심
바울은 이 대목에서 성령을 언급합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받는다고 말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데에는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내면의 심리에서 발현하는 게 아니라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말은 인간의 존재 가치를 낮추는 게 아니라 오히려 높이는 겁니다. 인간은 도구로 다뤄질 수 없는 고유한 영적인 존재라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생명의 가장 깊은 차원에는 왕이나 권력이나 돈이나 그 어떤 환난이라도 손을 댈 수 없는 영혼의 자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 영혼의 자리가 곧 성령과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오늘날 인간 삶의 전방위적 차원에서 대세로 자리를 잡아가는 생성형 인공지능과 경쟁하는 중입니다. 인공지능 학자들은 인간의 모든 사유와 영혼 현상을 뇌의 생리적 작용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술과 철학과 종교 현상은 모두 뇌의 기계적 작용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영적인 경험을 뇌 신경의 화학작용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뇌 작용이 현상적으로 나타나기는 하나 더 깊은 차원이 있다고 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계산기는 인간보다 더 뛰어난 계산 능력이 있으나 수를 개념적으로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사과에 대한 질문을 ‘쳇 GPT’에게 질문하면 멋진 대답을 얻을 수 있으나 그 대답은 수없이 많은 가상 공간의 정보를 취합하여 질문한 사람의 의도대로 문장을 만든 것이지 사과를 직접 맛본 사람의 대답은 아닙니다. 그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인간 영혼 문제가 정리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런 질적인 차이가 완전히 극복되는 임계점이 올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고, 반대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스물여덟 살에 독일의 본(Bonn) 대학교 석좌 교수가 되었다 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나는 뇌가 아니다』(Ich ist nicht Gehirn)에서 인간을 뇌 기능주의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자연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종교는 뇌의 작용에서 일어나는 미신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연과학을 무시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과 세상은 자연과학만으로 해석될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과학적인 사실만 reality가 아니라 신학적인 사실도 reality라는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의견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이 주어짐으로써 경험한다고 말한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주 특별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다룰 때 죄와 의로움 문제를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8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죄인이었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다고 말합니다. 1절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린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을 죄가 아니라 의가 지배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죄는 두려움이고 의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 가운데서 살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자기가 버림받을까 하는 걱정이 죄이고 두려움입니다. 그런 걱정에서 벗어났으니까 의인이 된 것이고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확증되었다는 바울의 증언이 믿어지나요?
저와 여러분은 언젠가 이 땅에서 사라질 겁니다. 우리의 몸은 지구의 원소로 해체됩니다. 시간의 차이만 조금 있을 뿐이지 우리 모두 똑같이 그런 운명에 떨어집니다. 도대체 산다는 게 무엇일까요? 결국, 소멸한다면 살아야 할 의미가 있을까요?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곧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여기서 참된 자유가 주어집니다. 이를 바울은 갈 2:20a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자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기의 모든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는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 이미 그의 삶에서 자기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의 것이 없으니 잃을 것도 없습니다. 잃을 것도 없으니 잃을까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돈도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그 돈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데 사용될 수 있는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경지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에서 확증된다는 그리스도교 신앙 말입니다. 이런 신앙은 인격이 고상하거나 교양이 높아진다고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오늘 바울의 증언처럼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거기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2천 년 예배 전통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찬양을 불렀습니다. “성령이여, 오소서”(Veni Sancte Spiri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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