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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안식

마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02 추천 수 0 2023.12.10 20: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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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1:16-19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76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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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ZUh83sF9SOk 
성경본문 : 마태복음 11:16-19, 25-30 
영혼의 안식
마11:16-19, 25-30
성령강림 후 여섯째 주일, 2023년 7월 9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라는 경구는 복음서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문장입니다. 예수께로 가면 실제 삶과 마음이 아주 편안해진다는 약속처럼 들립니다. 29절에서는 그 내용이 더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이렇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비그리스도인이 이런 문장을 본다면 예수께서는 일종의 심령 치료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유명한 힐링 캠프 운영자처럼 보일 수도 있고요. 십 년 전 법명 혜민이라는 승려가 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은 최단시기에 밀리언셀러가 되었다고 합니다. 마음을 치유하는 가르침입니다. 비슷한 책들은 오늘까지 이어집니다. 오은영 박사의 심리분석과 처방이 예능적 요소까지 가미되어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이런 현상은 한국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이 지쳐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10년 전 독일 칼스루에 대학교 교수로 있는 한병철 교수가 쓴 『피로 사회』가 인문학 서적으로는 크게 주목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권수영 교수(상담학)는 비슷한 시기에 케이블 채널 CBS의 힐링 프로그램 ‘솔로몬’에 출연해서 예수님을 힐링의 모델로 제시했습니다. “예수가 보여준 힐링은 자신이 곧 살려낼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펑펑 흘린 공감에서 나온다. 예수의 공감은 당시 가장 소외된 사회적 약자의 ‘밑바닥에 서는’(under-stand) 행위였다.” (인터넷 **** 신문에서)
 
귀를 기울일만한 내용입니다. 그런 힐링 캠프 유의 책이나 프로그램을 통해서 사람들은 삶의 소소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제로 도움을 받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 치유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리스도교 영성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는 도덕 선생이 아니고 인간의 내면에 있는 종교성을 계발하고 촉진하는 ‘뉴에이지’ 운동의 교사가 아니며 정치적으로 사회구조를 바꿔보려는 혁명가도 아닙니다. 그는 사람을 개조하고 그 능력을 계발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비유적으로, 폭풍이 밀려오는 중입니다. 각각 대처 방법이 다릅니다. 지하실로 숨으라고 조언하는 사람이 있고, 폭풍은 허상이니까 가부좌하고 자기 마음에 집중하라고 충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안할 때는 재미있는 티브이나 유튜브 방송을 보라거나 술을 마시는 게 최선이라고도 말합니다. 폭풍은 오지 않으니까 호들갑 떨지 말라고 하고, 아무리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으니 죽음을 각오하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폭풍이 어떤 현상이고 어떤 위력이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그 하나님은 우리의 ‘아바 아버지’라고 외쳤습니다. 그 하나님을 직면해야만 참된 의미에서 인간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선포를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세례 요한과 예수
 
이 질문에 답을 얻으려면 오늘 본문의 배경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마 11:16~19절에는 아이들 놀이가 비유로 나옵니다. 장터에서 아이들은 혼인 잔치와 장례의식을 흉내 내면서 놉니다. 한쪽 아이들이 피리를 불면 다른 쪽 아이들은 춤을 추고, 한쪽 아이들이 울면 다른 쪽 아이들은 가슴을 쳐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그런 놀이에 전혀 흥미가 없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대한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놀이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투정을 부리는 아이들처럼 세례 요한의 삶과 가르침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도 거부했습니다.
 
세례 요한에 관한 이야기는 마 3장부터 나옵니다. 요한은 엄격한 도덕주의적인 금욕주의자를 대표합니다. 그는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만 먹으면서 요단 광야에서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그 선포의 핵심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의 설교는 강렬했기에 유대 민중들의 영혼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정도니까 당시 분위기가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그런 분위기만으로 세례 요한을 당시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좋아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선은 세례 요한처럼 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옷 두 벌 있는 사람은 옷 없는 자에게 나눠주라는 식의 가르침이(눅 3:11) 현실적이지 않아 보였을 겁니다. 우여곡절 끝에 요한은 헤롯 왕과 그의 부인 헤로디아의 부도덕한 행위를 비판했다가 체포당하고, 나중에 참수형을 당합니다. 유대의 마지막 선지자인 요한의 운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운명과 비슷했습니다.
 
마 11:2절에 따르면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서 ‘당신이 메시아인지 대답하라.’라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을 엘리야와 버금간다고 칭찬한 다음에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아이들의 놀이를 비유로 말씀하시고, 18~19절에서 그 상황을 정확하게 밝히셨습니다. 금욕적으로 살았던 세례 요한을 사람들은 귀신 들렸다고 말하고, 보통 사람들의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았던 예수 당신을 경건하지 못하고 율법에 어긋난 사람이라고 말한다는 겁니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유대교 당국자들과 민중들이 세례 요한의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불편하게 여겼다면 예수님의 자유 분망한 삶은 받아들여야만 했는데, 실제로는 예수님을 훨씬 더 노골적으로 거부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싫고 예수는 더 싫다는 겁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중심에는 율법이 놓여 있습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의 삶에서 절대 규범입니다. 요한은 이 율법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으라고 주장하니까 불편했고, 예수께서는 율법의 본질을 말하니까 기분 나쁜 겁니다. 요한은 율법을 너무 철저하게 지키니까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고, 예수께서는 자신들의 위선을 까발리니까 신성모독자로 몰아간 겁니다. 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일에 만족했습니다. 그걸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율법주의가 그들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득권이었습니다. 율법 조문에만 충실하면 그 사회에서 존경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바리새인, 제사장, 서기관 등등, 당시 유대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에게는 일종의 율법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걸 타파하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위험인물입니다.
 
심리적 죄의식
 
물론 어떤 사회, 어떤 나라라고 하더라도 완벽한 제도는 없으니까 율법 카르텔이라 해도 좋고, 율법 종교라 해도 좋고, 법치 제도라고 해도 좋은데, 그 율법이 순기능을 감당한다면 그걸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 당시와 마태복음이 기록되던 당시의 율법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율법은 28절의 표현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안식일에는 모든 일을 멈춰야 합니다. 불을 지펴서 밥을 새로 지으면 안 됩니다. 일정한 거리 이상을 걷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리와 죄인을 가까이하면 안 됩니다. 당시에 바리새인을 중심으로 특수 계층의 사람들만 율법 조문대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대다수 사람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일종의 심리적 불안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 눌리는 삶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죄는 심리적인 죄의식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과 심리적인 죄의식은 다릅니다. 이걸 혼동하면 신앙이 병듭니다. 일본 강점기의 잔재인데, 제가 어렸을 때 어린아이들이 말썽을 부리거나 울면 ‘순사 온다.’라고 겁을 주었습니다. 순사가 실제로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무섭다는 심리 상태로 떨어지는 겁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자칫하면 이런 심리적인 죄의식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대표적인 사조가 청교도 영성입니다.
 
한국교회는 유럽 청교도가 미국에 건너가서 세운 미국식 영성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미국교회 영성은 청교도 신앙과 부흥 운동의 결합입니다. 두 가지 운동의 토대가 바로 심리적인 죄의식입니다. 자기를 죄인이라고 여기고 교회에 나와서 눈물 흘리면서 기도합니다. 그런 경험이 아주 뜨겁기에 열정적으로 봉사하고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 이들이 한반도에 선교사로 왔습니다. 예배도 전도 집회처럼 진행되었습니다. ‘총동원 전도 주일’ 행사를 열어서 죄인을 회심시키고 예수의 제자로 결단하게 합니다. 술과 담배와 도박을 끊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인간이 되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무늬만 달라질 뿐입니다. 무늬만 달라진 상태에서 살다 보니 위선에 기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부동산 투기 등으로 불로소득을 올려도 십일조 헌금만 잘하면 교회에서 인정받습니다.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악덕 기업가가 교회에서는 믿음 좋은 장로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심리적 죄의식과 도덕주의에 깊숙이 떨어진 한국교회는 한국의 역사 앞에서 무책임하기도 하고, 오히려 역사를 후퇴시키기도 했습니다. 남북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독일통일을 이끈 가장 강력한 세력의 하나가 독일 개신교회라는 사실과 우리 남한 교회는 완전히 반대의 길을 가는 중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과 지도자에게 북한은 마녀일 수밖에 없습니다. 심리적인 죄의식에 묶여 있어서 자기보다 죄가 더 많은 대상을 찾아내려는 본능이 작동하는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 자신이 상대적으로 선하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누가 더 죄인인지를 살피면서 상대적인 우월감에 만족스러워합니다. 남한 교회가 여러 유형의 소수자를 혐오하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영혼의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겁니다.
 
참된 쉼
 
그렇다면 예수께 오면 참된 쉼이 주어진다는 말씀이 과연 설득력이 있나요? 이 문제는 근본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영혼의 안식을 방해하는 모든 불안과 스트레스와 분노 등은 결국 ‘자기’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는 데서 옵니다. ‘자기’가 문제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자기가 빠져야만 이 문제가 해결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제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저 ‘자신’을 빼고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대한민국의 정치 영역에서 벌어지는 골치 아픈 일도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장면으로 보는 겁니다. 세상을 냉소적으로 대하겠다는 게 아니라 ‘나’와의 관계를 떼어놓고 보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언젠가 이 세상은 ‘나’ 없이 돌아갈 테니까요. 그런 세상을 미리 살아내는 겁니다. 자기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정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여기에 해당하겠지요. 자기가 뒤로 물러나야만 세계와 거기서 벌어지는 사태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그럴 때 영혼의 안식도 주어지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와 반대로 돌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자기에게 몰입하라는 소리를 귀가 따갑도록 반복해서 듣습니다. 어느 한순간도 자기를 놓치면 큰일이 날 듯이 다그칩니다. 시인 정철훈은 이상국 시인의 시집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 발문에서 “너무 오래 서울과 일인칭에 시달렸네”라는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 서울은 중앙의 시풍을, 일인칭은 과도한 자아의 출몰을 함축한다.” 그가 말하는 과도한 자아의 출몰은 피로 사회의 근본 원인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상징되는 현대 문화 현상은 사람을 점점 더 자기에만 몰두하게(자기 연민) 만듭니다. 성경은 이 자기 연민(나르시시즘)을 죄라고 말합니다. 자기 연민은 교만의 이면이기 때문입니다. 안하무인의 행태를 보이는 독재자들은 대개 자기 연민이 과도하게 강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자기에게 몰입하도록 강요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를 부정하는 일이 인간 실존에서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인정욕구는 본능적입니다. 뭔가 도사 연하면서 자기는 물처럼 바람처럼 산다고 말은 해도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자기가 없으면 세상도 없다고 여깁니다. 이런 생각을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입니다. 신학 개념으로는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입니다. 이 이신칭의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주장한 핵심 개념이고,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교회의 업적신앙을 배척한 핵심 개념입니다. 너무 뻔한 설명처럼 들리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말은, 즉 하나님과 결속한다는 말은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아야 인정받는다는 말도, 그와 결속한다는 말도 이해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일은, 즉 이신칭의는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한자리에 머물고 있고, 어떤 그리스도인은 인생 연륜과 더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고 들어가야 합니다. 깊이 들어간 만큼 여러분의 영혼은 안식과 자유를 누릴 겁니다. 참된 쉼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오, 주님! 당신은 당신을 위해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기 전까지는 쉼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각자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마음을 수련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힐링 캠프에 참가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내면에 숨어있는 진리의 빛을 찾으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라는 인격체인 당신에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과 하나이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 본문 27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말씀을 토대로 해서만 성립합니다. 거꾸로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을 수 없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당신만이 아신다고 하신 그 아버지를 아는 일에 한 걸음 더, 아니 반걸음이라도 더 들어가 보십시오. 참된 사랑을 경험한 사람처럼 영혼의 안식이 무엇인지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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