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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후의 하나님
욥기 34:1~30
욥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이 찾아와 위로하는 말들이 위로는커녕 상처를 헤집고 뿌리는 소금처럼 쓰렸습니다. 욥의 고통이 큰 이유는 고통 그 자체 못지않게 자신을 말로 공격하는 친구들의 태도와 누구도 자기 말에 공감해 주지 않는 현실이었습니다. 자기 말에 귀를 기울여줄 사람이 세상천지에 아무도 없다는 절망감은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빈곤입니다. 누구로부터도 관심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주는 절망감에 욥은 휩싸여 있습니다. 욥의 억울한 하소연을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모두 외면합니다. 엘리후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엘리후는 기세등등하게 등장하여 욥과 친구들의 말을 반박합니다. 친구들의 말은 함량 미달이고, 욥의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조롱이라고(7)) 서슴없이 비난합니다. 그의 말에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나 자비심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억울한 자의 말을 비틀고 왜곡하고 조롱하고 야유합니다.
엘리후가 인식하는 하나님은 ‘사람을 절대로 공평하게 대하시는 정의로운 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람이 한 일을 따라서 갚아 주시고, 사람이 걸어온 길에 따라서 거두게 하시는 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악한 일이나, 정의를 그르치는 일은, 하지 않으십니다.”(34:11~12)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이미 앞서서 욥을 공박한 세 친구의 주장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며, 절대로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누구라도 하나님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엘리후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욥에게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절대 권능과 절대주권을 강조하느라 도리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하나님과 공동, 또는 대리 통치자로서 사람의 위치를 외면합니다. 창조자 하나님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독야청청 고독하게 존재하는 기계적 절대자 되기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인정하여 협력하고 신뢰하여 소통하는 상대적인 의미의 절대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통하여 자기 권한을 스스로 제한하고, 사람에게 고유의 자리를 마련하여 주어 그 역할 수행에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닦달하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낮아져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므로 인간의 능력이 발휘되기를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엘리후는 이런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될수록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조리의 원인 역시 하나님 탓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였습니다.
엘리후처럼 하나님을 이해하는 신앙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정의로운 심판주로 인식합니다. 그 하나님은 인간이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악인에게는 벌을 주지만 선인에게는 상을 주십니다. 그것이 정의이고, 앞서 욥의 친구들이 설파한 규범적 지혜입니다. 엘리후 역시 이 논리에 갇혀있습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런 하나님 이해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전부가 아닙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입니다. 기쁜 소식이란 행위대로 갚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입니다. 엘리후의 하나님 이해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없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욥이 경험하고 있는 ‘의인을 벌하시는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역설 아닐까요? 엘리후의 하나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는 없습니다.
주님, 사랑에서 배제되었다는 절망감이야말로 가장 큰 슬픔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억울함을 말해도 누구 하나 귀 기울여 듣는 이가 없을 때 사람은 절망합니다. 귀를 열고 사랑의 실천자 되기를 노력하겠습니다.
2023. 12. 1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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