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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후의 신학 (욥기 34:31~35:16)
<욥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에 엘리후는 가장 연소자입니다. 처음에 그는 조용히 어른들의 말을 듣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더 참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대화에 참여하였습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은 거침없습니다. 그를 통하여 욥 친구들의 한계가 극복되고 욥의 질문이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기대하였던 젊은 지성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노회한 화법으로 욥을 대하는 모습이 당돌하고 버릇없어 보입니다. 젊은이는 물론 누구라도 이런 화법을 구사하는 일은 조심해야 합니다.
엘리후는 자기 말을 확신있게 강조하지만,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상적인 하나님의 통치 세계를 낙관합니다. 엘리후의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의로운 자가 기도하면 즉각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이런 엘리후의 하나님 인식은 “성읍 안에서 상처받은 사람들과 죽어 가는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도, 하나님은 그들의 간구를 못 들은 체하신다”(24:12)는 욥의 하나님 인식과 차이가 있습니다. 엘리후는 텍스트 중심의 너무 정직하고 순진무구한 신학을 피력합니다. 그의 하나님 옹호 신학을 십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콘텍스트를 중심한 욥의 질문 신학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땅의 현실은 엘리후의 신학보다 욥의 신학이 실제적입니다. 텍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에는 불합리한 인간 사회에서 이유 없이 고통당하는 약자의 설움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는 신학이 도리어 폭력이 됩니다.
엘리후가 욥에게 요구하는 것은 ‘정의로운 하나님과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욥 어른은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잘못이 무엇인지를 일러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시면서, 다시는 악한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있으십니까?”(34:31~32) 옳은 말 같아 보이지만 엘리후의 말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피해자에게 화해를 강요하는 일은 2차 가해입니다. 엘리후는 욥의 말을 인용하여 자기 마음대로 왜곡하여 재단하고 욥을 윽박지릅니다. 욥이 처한 상황과 맥락은 빠져있습니다. 욥의 말을 기계적으로 인용하여 욥을 정죄하고 단정합니다. 회개는 압박하므로 되지 않습니다. 부당한 회개 압박은 그 자체로서 폭력입니다. 신학으로 위장된 야만의 언어를 경계하여야 합니다. 신본주의로 위장한 엘리후의 신학을 조심해야 합니다.
엘리후의 신학을 한마디로 하면 공감이 빠진 신학입니다.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이의 말을 경청하기는커녕 단죄하고 저주합니다. 신학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독재자의 권위로 홀로 독야청청 영광을 독식하는 욕심쟁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자신의 권한을 기꺼이 제한하고 사람에게 자유를 주셨으며 스스로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인간을 윽박질러 굴종을 요구하지도 않고 자발적으로 순종하기까지 기다리십니다. 인간이 행복하기를 가장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인본주의의 시초입니다. 며칠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경기연회 재판부는 성소수자를 축복하였다는 이유로 한 젊은 목사를 출교시켰습니다. 공감 능력이 삭제된 신학은 그 자체로 흉기입니다. 동정과 긍휼이 제외된 신학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폭력입니다. 텍스트 신학자들이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주님, 성령님은 공감의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의 부조리한 현실로 몸과 마음을 아파하는 이들을 동정하지 않는 이들이야말로 반(反) 성령의 사람은 아닌지 의심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기를 빕니다.
2023년 12월 12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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