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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위하여?
욥기 36:1~25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을 위한다는 착각입니다. 엘리후가 그렇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36:2) 이를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음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보내는 편지에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롬 14:8)는 결의를 보는 듯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일이 있고, 할 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자신이 하는 모든 말이 하나님을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특히 젊은이에게는 이런 호기가 있어야 합니다. 피죽도 못 먹은 사람처럼 비실거리거나 애늙은이 행세를 하며 양지에서 조는 병든 병아리 같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위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말과 행위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후가 대표적입니다. 그가 쏟아 낸 수많은 말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까요? 말을 많이 할수록 하나님을 난해한 분으로 만듭니다. 확신에 찬 행동이 도리어 하나님을 거스를 수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해 설교하는 목사들이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입니다.
엘리후는 여전히 텍스트 신학자의 순진무구함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하나님은 “악한 사람을 살려 두지 않으시고, 고난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하십니다. 의로운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그들을 보좌에 앉은 왕들과 함께 자리를 길이 같이하게 하시고, 그들이 존경을 받게 하십니다”(36:6~7). 그의 하나님 옹호 신학이 기특합니다. 하지만 골방의 하나님과 길거리의 하나님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텍스트의 하나님과 콘텍스트의 하나님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엘리후가 말한 바대로 악인을 징계하시고 가난하고 약한 자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가 속한 사회에는 악인이 번성하고 거짓말쟁이가 승승장구합니다. 의로운 이들은 핍박받거나 손해 보는 게 현실입니다. 이런 세상에서도 우리는 악인을 징벌하시는 하나님, 의인을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우러릅니다. 정직한 신학이란 텍스트의 하나님과 콘텍스트의 하나님을 조화하는 일입니다. 억울한 자의 눈물과 약한 자의 고통을 흡수하지 못하는 신학은 관념의 신학에 불과합니다. 신학이 삶이 되기 위해서 개별성과 특수성의 콘텍스트 현실을 이해하고 약자의 고통과 슬픔을 체휼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신학은 제아무리 공을 들여도 껍데기 신학일 뿐입니다. 약자의 아픔과 교감할 줄 모르는 신학은 성령 부재의 신학, 싸구려 신학입니다.
엘리후는 세상 이치를 다 아는 듯 잘난 척합니다. 그는 욥이 뉘우칠 줄 몰라서 벌을 받는다고 면전에서 구박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말고 달게 받으라고 재판관처럼 다그칩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이유를 모르는 이는 욥도 욥이지만 정작 엘리후입니다. 엘리후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르는 게 없는 척합니다. 자기만의 신념에 사로잡힌 전형적인 꼰대의 모습입니다. 교만하고 강팍합니다.
주님, 신학은 그 특성상 언제나 따뜻한 법입니다. 그 특질을 잃으면 하나님을 빙자한 사탄의 학문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 언어로 신학 작업을 한다고 생명력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늘 조심하겠습니다.
2023년 12월 13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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