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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없는 하나님?
욥기 36:26~37:24
엘리후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하여 욥의 하나님 인식을 부정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파악 불가능할 정도의 신비성을 간직하신 분으로 상정합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셔서, 우리의 지식으로는 그분을 알 수 없고, 그분의 햇수가 얼마인지도 감히 헤아려 알 길이 없습니다.”(36:26) 자신이 하나님에 대하여 욥보다 더 정확히, 더 많이 알고 있다는 비교 의식에서 은근히 욥을 비꼬고 비하합니다. “두 손으로 번개를 쥐시고서, 목표물을 치게 하십니다. 천둥은 폭풍이 접근하여 옴을 알립니다. 동물은 폭풍이 오는 것을 미리 압니다.”(36:32~32) 천문기후학을 들먹이는 이유 역시 욥을 비난하기 위한 맥락이며 은근히 욥을 동물보다 못한 존재라고 비웃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남과 비교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생각이 불순합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종교가 된 후 교회 안에서는 수많은 신학 논쟁이 일어났는데 대개 엘리후 같은 생각 때문입니다. 논쟁은 단순한 논리 경쟁으로 끝나지 않고 상대를 정죄하여 추방하고 때로는 화형에 이르게 하는 반신학적인 일들을 신학의 이름으로 자행하였다는 사실이 끔찍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도 그런 일이 신학계에서는 여전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가로지르시면서, 번개를 땅 이 끝에서 저 끝으로 가로지르게 하십니다.”(37:3) 엘리후는 천둥과 번개와 폭풍과 눈과 비 등 천문학의 현상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과 위엄에 찬 현존을 비유합니다. 욥이 늘어놓는 자기변명과 하나님에 대한 의문을 단숨에 차단하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그에 비하여 욥은 하나님을 인격적 창조주로 믿습니다. 자신의 무한한 권능을 언약으로 스스로 제한하신 절제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이유를 모르고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질문하는 행위를 불경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신이 당하는 현실이야말로 하나님께 부르짖을 동기이며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에 비하여 엘리후는 인간의 질문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무한대하신 권능과 영광만을 앞세웁니다. 인간의 고귀함이 파괴된 현실에서 의인이 당하는 고통과 비애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동정을 보이지도 않고 긍휼의 마음도 없이 오직 ‘솔라 데오 글로리아Sola Deo Gloria’에만 열중합니다. 이런 신학은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외면하는 신학입니다. 십자가 없는 신학이고 긍휼 없는 신학입니다. 관념적이고 공허합니다. 이런 신학이 무기력한 유신론을 만듭니다. 이를 신봉하는 이들은 대개 실천적 무신론자가 됩니다. 오늘 이 땅의 교회가 대개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만사형통하고, 죄를 지으면 벌 받는다는 단순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고난받는 이유가 죄를 지어서만 일 수는 없습니다. 채찍을 통한 교정과 훈련의 목적을 뛰어넘는 고난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고난을 밥 먹듯 한 민족입니다. 이집트의 노예 생활을 할 때나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할 때 이스라엘은 욥의 질문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죄 없는 자가 당하는 고난은 이사야서 53장의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 메시아 대속과 잇닿아 있습니다. 인과율에 근거한 신학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며, 대부분 유예하십니다. 은총의 절대성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 하나님의 정의는 죄를 정죄하지만, 인간의 절망 상황에 처할 때는 회복시키시는 능력임을 믿습니다. 고난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해석에 신중하겠습니다.
2023년 12월 14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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