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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권 신학과 우주적 신학
욥기 38:1~18
드디어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지명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욥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고난에 처했습니다. 위로하기 위해 온 친구들로부터 위로는커녕 죄인으로 단죄되었습니다. 하도 답답한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고난의 이유를 알려달라고 반복하여 질문하였습니다. 그동안 묵묵부답이던 하나님께서 이제 욥을 콕 찍어 대답하기 시작하셨으니 욥으로서는 그 자체로서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끝나자 욥은 득의 한 듯 기뻐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질문은 인생의 질, 또는 가치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결정되듯이 어떤 질문을 받느냐에 따라 자기 삶의 격이 달라집니다. 심오한 질문은 격조 높은 인생을 예견하고, 질문이 많으면 정답도 많아집니다. 질문이야말로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로 이끌 수 있는 가장 탁월한 도구입니다. 질문이 멈추는 곳에는 성숙도 멈추며, 발전도 중단됩니다. 그동안 욥은 하나님께 공세적으로 질문하였습니다. 순서를 따르자면 이제 하나님이 대답하실 차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에게 대답하시지 않고 질문을 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욥의 불평을 잠재우기 위해서인 듯합니다. 이제까지 하나님께 질문을 쏟아 내던 욥이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38:2~3)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38:4a)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순간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욥을 거명하십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질문하시지만 사실 그 질문에는 그동안 욥이 해 온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물론 시간과 공간에 갇힌 욥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답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개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욥은 그동안 왜 죄 없는 자신이 악인들이 받는 재앙의 희생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욥의 질문은 매우 공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공세를 취하십니다. 창조의 시점에 존재하지 않았던 욥에게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38:4b)고 하십니다.
태초에 지혜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일을 시작하시던 그 태초에, 주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는 나를 데리고 계셨다.”(잠 8:22) 만일 욥이 태초의 지혜의 자리에 있었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과 악, 또는 상과 벌의 이원론에 근거하여 세상을 짓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역시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은 신상필벌(信賞必罰)과 인과율에 종속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유로우심은 그것들을 초월합니다. 인과율과 신상필벌의 이진법이 인간을 성숙시키고 고양시킬 수는 있으나 그것으로 하나님의 행동을 제한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몰이해입니다. 욥과 세 친구, 그리고 엘리후조차 이 함정에 갇혀 있는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기 38장은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대기권 신학을 넘어 하나님의 우주적 영원 신학을 제시합니다.
주님, 인과율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는 욥처럼 스스로 정한 한계 안에 하나님을 가두려는 속 좁은 신학을 탈피하는 용기를 주십시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12/1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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