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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욥기 38:19~38
아이들은 말을 배우면서 질문도 시작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에도 호기심을 갖고 신기해하며 어른에게 묻습니다. 질문이 귀찮다고 나무라면 아이는 시무룩해집니다. 유대인들은 아이들에게 질문하기를 중요하게 가르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셨습니다. 철학도 우주의 원리는 무엇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은 무엇인가? 심판은 있는가? 삶은 왜 공평하지 않은가? 내세는 어떤 세상인가? 누가 내세에 들어가는가? 하는 질문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 교육학 등 모든 인문학 역시 질문이 그 밑절미입니다. 질문을 소홀히 하면 인생과 인류 공동체의 답은 오리무중입니다. 질문이야말로 성숙한 인생의 기본기이며 공정한 세상의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질문을 귀찮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가부장적 부모나 교사는 자녀와 학생이 귀찮게 질문하는 것을 마뜩잖아합니다. 권위주의에 함몰된 교회 역시도 신도들이 질문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파시즘이나 나치주의의 독재자들 역시 다양한 시민이 자유롭게 자기주장 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질문이 멈추거나 약화되면 더 이상 성장과 성숙은 없습니다. 질문하는 자유가 사라진 곳에는 인간다운 삶의 공동체가 건설될 수 없습니다. 질문이야말로 인생을 가열차게 하며 인류 공동체를 발전시킵니다. 그런 점에서 인류 역사는 질문하는 자와 질문을 막으려는 자의 투쟁입니다. 지금도 질문을 막으려는 이들의 전근대적이고 퇴행적 모습을 어렵지 않게 봅니다. 언론을 겁박하거나 회유하여 곡필에 이르게 하는 수작은 악한 일입니다. 학문을 곡학아세曲學阿世에 이르게 하는 일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교회가 그 나라의 질서와 의를 외면하고 세속화하는 일은 배교에 버금가는 행위입니다.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느냐? 어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빛과 어둠이 있는 그 곳이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 그 곳을 보여 줄 수 있느냐? 빛과 어둠이 있는 그 곳에 이르는 길을 아느냐?”38:19~20 욥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질문 형식을 취합니다. 이제까지 하나님께 질문하던 욥이 이제 대답할 차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질문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어려운 천문학이나 까다로운 수학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바스 등 친구들처럼 욥을 단죄하기 위함도 아니며, 엘리후처럼 욥을 면박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욥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기만 하면 충분히 대답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욥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인지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질문은 술술 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요구하시는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질문이 많습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질문거리도 없습니다. 사람은 질문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조 후 인간은 피조물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그 자체가 질문입니다. 남에 대하여,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진지하고 정직하게 질문하는 것, 그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이란 질문이 끝나는 시점입니다. 질문의 능력이 되살아날 때 대답의 능력도 생기를 얻습니다.
주님, 질문이 사라진 세상은 시대를 역행하고 있습니다. 질문이 멈춘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무력화시키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하여 질문하지 않을 때 누구든 위선자가 됩니다. 질문하는 능력을 구합니다.
12/16(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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