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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
욥기 38:39~39:30
인간은 세상 이체에 대하여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혹 어떤 분야에 대하여서는 깊은 지식을 갖고 있더라도 다른 분야에 대하여서는 전혀 생소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천문지리를 꿰뚫는 석학이라도 사람의 심리를 헤아리는 일에는 젬병일 수 있고, 신학은 두루 섭렵하면서도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서는 무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학문의 벽을 허물고 인접 학문과의 통섭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20세기의 끄트머리에 지식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학문의 통섭’이야말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통합을 통해 새로운 문명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구분되지 않았으나 르네상스 이후 분화되었습니다. 인문학을 하는 이는 초보적인 자연과학의 지식도 없고, 자연과학자는 대중적인 문학조차 외면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인간의 기술과 지식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무엇이나 가능한 세상, 모든것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은 과학기술로 유토피아를 구현하려고 하고, 법 전문가들은 법 기술자가 되어 세상을 함부로 다스리려고 합니다. 유발 하라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호모 사피에스가 드디어 호모 데오스가 된 셈입니다. 자연과학을 비롯한 지식은 인간을 창조자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하지만 신적 지혜가 없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대에 아무것도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아이의 손에 쥐어준 원자폭탄의 뇌관처럼 위태롭기 그지 없습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대에 아무것도 못하거나, 아니면 이 시점이 인류의 종말일 수 있습니다. 인접 학문과의 통섭은 균형 잡힌 가치관을 통하여 사람다운 삶을 추구합니다.
규범적 지혜는 이분법의 세계관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지혜와 무지가 대립하고, 선과 악이 부딪칩니다. 정결과 부정, 순종과 거역이 마주하므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명하게 가름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39장에 등장하는 생물들 가운데는 모세의 율법에서 부정하게 취급하여 먹지 못하게 언급한 짐승들이 있습니다. 타조(레 11:16, 애 4:3)는 들개만도 못한 잔인한 짐승이며, 메뚜기(신 28:38,42)는 파괴와 동의어일 정도로 피해를 입힙니다. 매(레 11:16)와 독수리(레 11:13, 미 1:16)는 사체를 먹습니다. 성찰적 지혜는 이 짐승들이 ‘나쁜 짐승인가?’ 묻습니다. 정결과 부정을 나누는 기준으로 선과 악을 구분할 수는 없다는 점을 성찰적 지혜가 가르칩니다. 이를 수용한다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일도 헛된 일이며, 세상을 신앙과 불신앙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도 성찰적 지혜를 배반하는 셈입니다.
‘좋다’, 또는 ‘나쁘다’를 함부로 예단하는 일은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의 눈에 하찮게 보이는 짐승들도 나름대로 자기 삶을 이어갑니다. 사람이 개입해서 도와주지 않아도 절로 살아갑니다. 그들이 생존하는 광야에도 하나님의 질서가 있습니다. 모든 피조계는 저마다의 자유와 자율성이 작동합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광야는 결코 버려진 땅이 아닙니다. 교회 밖 세상 역시 이런 시선으로 보면 희망이 있습니다. 욥이 알아야 할 게 바로 이것입니다. 욥은 그동안 자기 문제에만 몰입하였습니다.
주님, 눈이 감겨 있으면 아무리 좋은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저의 눈을 열어주십시오.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세계를 겸허히 바라볼 줄 아는 자세를 갖추겠습니다.
2023년 12월 17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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