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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문고읽기045] 소크라테스의 변명 (플라톤)
[최용우책1047] 옮김:최헌 (초판 1987.2.10.)
<책에서 한구절>
“이제 우리는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사형을 받기 위하여, 그리고 여러분은 살기 위하여... 그러나 우리 앞에 어느 쪽이 더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는지 신 외에 아무도 분명히 알지 못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중
<독서일기>
기원전 399년 부당한 죄목으로 사형을 당한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신에 대해 변론을 한다. “아테네 시민여러분(재판관들을 말함) 어떻게 하든 나는 결코 나의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설사 죽음의 운명에 위협을 받는다해도.” 결국 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그는 시종일관 두려움 없이 자기의 소신을 말했다.
이 책은 플라톤이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대신하여 후세에 그의 뜻을 전해 주려고 심혈을 기울여 쓴 명저이다. 플라톤은 아테네 출생으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친구로 그의 이상주의는 서구 세계에 지대한 사상적 영향을 끼쳤다. 30세를 전후해 스승이 애매한 사형을 당하자 정치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철학으로 돌아섰으며, 아카데미(최초의 대학교 형태)를 세워 제자 양성과 저술에 몰두했다.
-최용우
<저자>
플라톤(Platon 기원전 427~347 B.C)
플라톤은 기원전 427년경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부터 정계의 유망주로 기대받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다. 플라톤은 유명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된 지 4년째 되는 해에 태어났으며, 전쟁은 기원전 404년에 아테네의 패배로 끝났으므로 전쟁 속에서 태어나 전쟁 속에서 성장하여 성인이 된다. 그는 맹목적인 삶보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소크라테스를 통해 배웠다. 플라톤의 집안은 비교적 상류계급이었고 그러한 배경을 가진 젊은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그 또한 한때 정치에 뜻을 두었지만, 그가 믿고 따르던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정치적인 배경이 있음을 확인한 후 정치에 회의를 느껴 철학에 매진하게 된다.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자주 외국 여행길에 올랐으며 교육에 대한 열의가 매우 높아 소크라테스 사후 많은 우여곡절 끝에 기원전 387년경 아테네 근교에 철학 중심의 종합대학인 아카데메이아라는 학원을 창설하였다. 그곳을 통해 뛰어난 수학자와 높은 교양을 갖춘 정치적 인재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많은 철학자를 양성하며 집필활동에 전념한다.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글도 남기지 않았지만, 그가 죽은 후 제자인 플라톤의 작품을 통해 그의 철학적 삶이 알려지게 되었다. 플라톤의 저서 30여 편 가운데 한 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어 ‘대화편’이라고 불린다. 《국가》 《소크라테스의 변명》 《향연》 《파이돈》 《크리톤》 《프로타고라스》 등에서 주인공으로 모두 소크라테스를 내세우고 있다. 이로써 많은 저서는 스승인 소크라테스에 대한 기록들로 스승의 영향이 플라톤의 사상적 근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플라톤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란 불가능하다. 고대의 사상가들이 그러하듯, 플라톤 역시 현대의 분과학문 체계로는 불가능할 법한 종합적 사상을 개진하였다. 그는 인식론적 측면에서 이데아를 제창함으로써 본질과 현상이라는 이분법적 사유를 발전시켰다. 《국가》는 플라톤의 정치관을 대변하는 저술로, 이 저서에서 플라톤은 민주적인 정치 체제보다는 지적 소양이 풍부한 귀족들에 의한 통치를 선호했다. 철인 군주론은 플라톤의 정치관을 잘 드러내는 개념이다. 그는 종종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다분히 현상 지향적이었다면 플라톤의 사상은 이상적이고 관념 위주였다는 평을 받는다.
<차례>
이 책을 읽는 분에게 - 7
에우튀프론 - 11
소크라테스의 변명 - 46
크리톤 -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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