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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못해도 나는 한다"
욥기 41:1~34
<욥기>는 무고한 자의 고통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임한 고통을 근거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의심합니다. 평소에 익숙하게 보아온 하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간섭하는 하나님의 생소한 모습이 이 세계 전체에도 미치는가 의심하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에 의문을 표시합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는 패륜적 무신자가 되지 않았고 저항적 무신론자의 길을 걷지도 않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자처하며 욥에게 무조건 회개를 촉구하는 친구들의 백기투항 주문에 응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익숙하게 알았던 신학적 패턴과 다른 하나님의 통치 방식에 집요하리만큼 따져 묻고 항변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대답을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욥에게서 질문하지 않으면 답을 듣지 못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배웁니다. 욥은 하나님을 의심하지만 우리는 욥의 신앙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신학을 꿰뚫는다고 자신하는 욥 친구들의 신학 밖에 존재하십니다. 도리어 무조건 주야장천 ‘하나님 옹호신학’을 주장하던 욥의 친구들은 책망을 넘어 단죄에 이릅니다.
욥이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질문하는 신학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어른들의 전쟁에 아이들이 죽어가고, 강대국들의 욕심에 힘없는 나라 시민이 골탕을 먹습니다. 자본을 매개로 한 인간의 거대한 욕망이 사회 양극화를 영속하고 대기권의 기후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하여 미래 인류는 볼모가 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인종차별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이 존재합니다. 도시 속에 꿈틀거리는 욕망이 비인간화를 부채질합니다. 권력의 단맛을 본 늑대 무리가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쥐락펴락하고 싶어합니다. 지식과 정보는 보편화되는데 정의는 멀고 평화는 더 아득합니다. 하나님께 질문할 시점이 지나고 있습니다. 욥처럼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물어야 할 때입니다. 체제에 익숙하고 습관화된 인습적 신학의 틀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려는 독선과 오만을 경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질문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질문해야 할 때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질문이 멈추면 대답도 중단됩니다.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낚을 수 있으며, 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느냐?”(41:1) 하나님은 가공할 만한 리워야단의 위력을 예로 들며 욥에게 ‘할 수 없습니다’ 대답을 유도하십니다. 길들여 지지 않는 괴수, 정복할 수 없는 리워야단이 너무 강하고 무서워 그 앞에 욥은 무력을 경험할 뿐입니다. 자신에게 임한 고난 앞에 속수무책 당하기만 하는 욥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대항하여 묻고 따지고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욥의 자세를 따져 묻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리워야단 담론의 핵심은 ‘나는 할 수 있다’에 있습니다. 욥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욥이 받는 고통과 인류가 당하는 재난과 부조리들을 하나님은 통제할 수 있습니다.
베헤못과 리워야단은 순치가 불가능한 괴수입니다. 오늘 이 땅에는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야수성의 인간들이 존재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반역적 저항성일 수도 있습니다. 욥처럼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던 현상이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주권을 믿습니다.
주님, 베헤못과 리워야단 같은 순치할 수 없는 악이 이 땅에 가득합니다. 욥처럼 알 수 없는 이유로 고난에 처한 이들의 신음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주권을 믿으며 기도합니다. 이 땅과 저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2023년 12월 19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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