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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 낙관주의
욥기 42:1~17
<욥기>는 하나님과 사탄의 천상회의가 있고 난 후 욥에게 쏟아지는 재난들, 그리고 욥과 그 친구들 사이의 긴 논쟁, 그리고 대화에 등장하신 하나님의 대답에 이르는 이야기에서 여러 사건과 무성한 말들이 이어졌습니다. 욥에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가득하였고, 친구들은 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욥은 그동안 하나님께 불평하며 쏟아 낸 의문이 일시에 풀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대답 자체가 욥에게는 위로였고 해답인 셈입니다. 욥은 즉시 이를 하나님께 고지합니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42:3) 욥은 자신이 함부로 하나님에 대항하며 하나님의 정의로운 세상 통치에 시비를 건 사실을 뉘우쳤습니다.
나는 성경이 말하는 종말론이 낙관적이라고 믿습니다. <욥기>에서 그동안 계속하여 친구들의 말을 통하여 강조한 인과율에 근거한 하나님의 정의가 규범적 지혜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자의적 주권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합니다. 즉 착하고 의롭게 살았던 욥이 고난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허물과 죄로 더럽혀진 인생에게도 기회가 있고 희망이 있다는 역설적 가르침이라는, 의미심장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욥은 당시의 신학, 인과율에 기초한 신명기적 신학을 초월하여 전혀 새로운 신학의 세계에 진입한 셈입니다. 바로 이것이 은총이고 긍휼이고 복음입니다. 바울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롬 3:21)인 셈입니다. 그래서 <욥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고통을 예기하는 구약신학의 금자탑입니다. 욥은 이 사실을 즉시 깨달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죄가 없는데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가?’ 하는 질문을 걷어 들였습니다.
욥을 말로 괴롭히던 친구들은 주님의 명령대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욥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욥은 그들을 용서하여 주므로 우정을 회복하였습니다. 형제와 자매와 전부터 알던 친구들이 욥을 찾아와 그간의 고통을 동정하고 위로하며 회복을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특히 눈에 뜨이는 것은 딸들이 슬로브핫의 네 딸처럼(민 27:1~7) 아들들과 동일하게 아버지의 기업을 상속받았다는 점입니다. ‘은총의 나라에 차별은 없다’로 읽습니다. 주님께서는 욥의 말년에 이전보다 더 많은 복을 주시므로 신명기적 신학인 의인번성론을 입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종말론은 낙관적입니다.
욥의 고난은 인과율에 따른 필연적 고난이 아니라 죄와 상관없는 우발적 고난입니다. 비록 욥이 억울하다고 이의를 제기하지만,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서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입니다. 이 고난은 원인이 없을 뿐이지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 바로 그 예입니다. 우리는 <욥기>를 통하여 인과율을 초월하는 새로운 신학을 배워 알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몰랐던 욥에 비하여 오늘 우리는 더 높고 멋진 삶을 살아야 할 존재입니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해피 엔딩입니다. 결과를 확신하는 자의 당당한 삶이 필요합니다.
주님, 저희는 오늘의 삶을 통하여 내일의 신분을 결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얻은 신분을 오늘 여기서 살아야 할 존재입니다. 자신감을 갖고 당당하고 거룩하게 살 담력을 주십시오.
2024. 12. 20(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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