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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을 채운 자유
빌립보서 1:12~2:4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힌 상태입니다. 으레 감옥이란 한계와 절망의 장소이지만 바울은 그 안에서 기쁨과 감사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흉악범이 아니고 국사범도 아닌 바울은 비교적 자유롭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할 수 있었고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투옥이 복음의 진전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울의 구금 소식이 로마 친위대 안팎에 알려지므로 복음 접촉의 기회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감옥에 갇히는 죄수란 대개 법을 어기거나 악을 행한 사람이 일반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달랐습니다. 친위대 군인들은 ‘이렇게 착한 분도 감옥에 오는가?’ 의아하였을 것이고 이런 점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었을 것입니다. 감옥의 바울은 교정과 훈육의 대상이 아니라 친근한 대화의 상대가 되고, 존경의 대상이 되어 친위대 군인들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되었습니다. 감옥은 악한 사람이 가는 곳이기도 하지만 세상이 수용할 수 없는 사랑의 마음을 품은 성인이 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은 다른 복음 전도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였다는 점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순수한 동기로 겁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동기의 순수한 여부와 상관없이 결국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기뻐하였습니다. 바울의 넓은 이해심과 긍정의 생각이 귀감입니다.
바로크의 대가 렘브란트1606~1669는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1627을 상념이 깊고 생각이 골똘한 노인의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지푸라기가 널려있는 감옥에 바울은 맨발로 옷을 여러 겹 끼어 입은 모습입니다. 두꺼운 외투는 밤에 이불의 역할도 하였음이 분명합니다. 렘브란트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을 통하여 지난겨울의 추위와 한밤의 고독을 감옥에서 쫓아버립니다. 햇볕의 따스함이 벽을 채우고 늙은 사도의 이마를 지나 손을 통해 발에 이릅니다. 음산한 감옥에 따스함이 가득합니다. 형벌의 장소를 은혜로 가득 채웁니다. 빛의 마술사다운 화가의 기량입니다. 바울은 글을 쓰고 있다가 잠시 생각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미 써놓은 글이 가득합니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이 빌립보에 보내는 편지일 가능성이 큽니다. 처음 빌립보에 갔을 때의 추억을 회상하며 그동안 여러모로 힘이 되어준 교인들을 생각하니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사도의 오른편에는 장검이 세워있습니다. 화가가 바울을 그릴 때 빠트리지 않는 소품이 바로 장검입니다. 복음을 상징하는 장검은 바울과 붙박이입니다. 그림 속 바울은 그의 다른 작품과 달리 왼손잡이로 보입니다. 아마도 바울의 오른손은 생각과 장검을 잡기에 유용한 손임을 강조한 표현이려니 싶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신앙은 미신입니다.
바울은 물리적 감옥에 갇혀 있으나 실상은 그리스도에게 갇혀 있습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바울은 자유를 갈망하는 모습이 아니라 이미 자유를 누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고통스러운 현실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그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능력을 갖추라고 렘브란트가 채근하는 듯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2:4)
혹한의 세상에서 따뜻한 사람이 되는 일, 연약한 이들 옆에 서주는 일, 바울이 주는 권면이 절실한 때입니다.
주님, 감옥에서 자유를 누리는 바울처럼 저희도 이 땅에서 하늘을 살 믿음과 담력 주시기를 빕니다. 비록 삶이 우리를 속이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서로 연대하며 연약한 이를 세우는 일을 힘쓰겠습니다.
2023. 12. 22 금
그림 #렘브란트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 1627, 판넬에 유채, 73×60cm, 슈타츠갤러리, 슈투트가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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