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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과정에 있습니다
빌립보서 3:12~21
서양 역사에서 미술이 종교의 종노릇이나 하면서 명맥 유지하기를 천년이나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때 철학은 신학의 시녀 노릇을 하였고 교권은 세속권을 포함하였습니다. 이를 흔히 중세라고 하는데 이때 미술은 역동성도, 창작성도, 개성도 매우 미미하였습니다. 문맹률이 높던 시절이라 교회의 요청대로 교리적 가르침과 성경 이야기를 시각화하는 일이 고작이었습니다. 미술이 오랜 미몽에서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은 르네상스 때입니다. 인간성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거나 가볍게 여겨온 중세와 교회의 권위에 균열이 생기면서 인간을 긍정의 눈으로 보고 개성을 강조하는 풍토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마땅히 교회가 해야 할 일이지만 교회는 인간을 음지에 가두고 싶어하였으니 본질을 배반하여 존재하는 종교성이 슬픕니다. 조화와 통일을 앞세운 르네상스는 세상에 불타올랐습니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천재 예술가의 활동은 들불처럼 막힘이 없었습니다. 이때 비로소 미술은 예술이 되었고, 예술가는 창작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르네상스도 저물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어 등장한 미술사의 흐름이 바로크입니다. 바로크는 16세기 종교개혁으로 교인과 재산과 땅의 절반가량을 잃은 로마기톨릭교회의 반동종교개혁의 일환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카라바조1571~1619는 로마가톨릭교회가 고대하던 화가였습니다. 빛과 명암의 극명한 대비를 통하여 연극의 정지된 화면처럼 묘사하여 사실감을 고조하였습니다. 베드로를 머리로 여기는 로마가톨릭교회는 카라바조에게 바울을 그리라고 요구하였고, 카라바조는 이에 성실히 부응하였습니다. 이는 루터와 칼뱅 등 종교개혁 진영에서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를 강조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때 ‘카라바지스티’라 이름하는 카라바조의 추종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천재적인 예술가를 흠모하며 그를 모방하려는 경향은 자연스럽습니다.
종교개혁 성향이 강한 네덜란드에서 활동한 바로크의 거장 렘브란트는 자연스럽게 바울을 그렸습니다. 함께 작품 활동하며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은 얀 리벤스1607~1674도 바울을 그렸습니다. 리벤스의 <사도 바울>1627~1629은 렘브란트의 작품과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구도와 화풍과 도상, 그리고 빛의 흐름이 유사합니다. 다만 렘브란트의 작품에 비하여 바울의 눈이 흐려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눈이 짓무를 정도로 어두운 감옥에서 쓴 편지들은 훗날 정경이 되어 인류 구원의 복음이 되었습니다. 리벤스의 상상력과 묘사력이 놀랍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3:12)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17). 그러면서 자신은 아직 완성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미완성 상태를 감추고 완성에 이른 것처럼 과장하기 마련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3:13~14) 살아있는 모든 인생은 완성에 이르지 못합니다. 과정에 있을 뿐입니다. 과정이 완성은 아니지만 시작 이전의 상태도 아닙니다.
주님, 모르면서도 아는 체하거나, 되지 못했으면서도 된 척하는 오만에 이르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이미 저희 안에 거룩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께서 완성에 이르는 일 역시 선히 이끄실 것을 믿습니다.
2023. 12. 25 성탄절
그림 : #얀_리벤스 <사도 바울> , 1627~1629, 캔버스에 유채, 119×108cm, 내셔널갤러리, 스톡홀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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