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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목표일수록…
신명기 1:19~33
지금 <신명기>를 설교하는 곳은 모압입니다. 모압 평지는 요단강 건너편으로, 강만 건너면 가나안입니다. 이곳에서 모세는 38년 전 일을 회상하는 설교를 합니다. 그때도 이스라엘은 가나안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습니다. 호렙을 떠나, 우리가 본 그 크고 무서운 광야를 지나서, 아모리 사람의 산지로 가는 길을 따라 가데스바네아까지 이르렀습니다.”(1:19) 모세는 마치 어제 일처럼 가데스 바네아의 추억을 소환합니다. 38년 전 시내 광야에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출애굽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시내 광야를 출발하여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는 가나안 남부 접경이었습니다. 이곳만 지나면 가나안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 대하여 모세는 ‘크고 무서운 광야를 지나’로 묘사합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쉽게 되는 일이 없습니다. 싸구려 복권 한 장으로 인생을 바꾸려는 시도는 유치합니다. 거짓말 몇 마디로 남의 돈을 끌어모으는 재주를 가진 사기꾼을 존경해서는 안 됩니다. 천박한 기술과 잔재주로 진실한 인생을 농락하는 이들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세월이 하 수상하여 악한 이들이 형통하는 듯하고 불의한 이들이 득의 하는 것처럼 보여도 무거운 걸음으로 보폭을 넓히는 훈련은 오롯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따뜻한 남풍만 계속되면 얼마 가지 않아 사막화되기 마련입니다. 견디기가 벅차고 매서워도 불어오는 북풍을 견디어 내어야 합니다. 크고 무서운 광야를 거쳐야 반듯하고 튼실한 인생이 됩니다. 거룩한 목표일수록 남모르는 지난한 과정이 있습니다. 삶의 과정이 어려울수록 인생은 진득해 자는 법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모세의 신인식과 이스라엘 백성의 신인식에 극명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땅이 앞에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올라가서 차지하라’고(21) 합니다. 그런데 백성은 ‘땅을 탐지하는 일이 우선이다’고 주장합니다(22). 그래서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두 명을 뽑아 가나안을 탐지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하는 보고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이 좋다’였습니다(25). 하지만 백성은 그 땅으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신다. 아모리 사람의 손에 우리를 내주어 전멸시키려고,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이처럼 이끌어 내셨다. 우리가 왜 그 곳으로 가야 한단 말이냐? 무모한 일이다.”(2:27~28) 그들은 정탐꾼들이 들고 온 가나안의 열매를 보고 마음이 혹했지만 가나안에 살고 있는 거인족 아낙 사람과 견고한 성읍 이야기를 들으며 간담이 서늘해졌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당신들을 대신하여 싸운다’고 하였지만 백성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의심하고 머뭇거리고 또 의심합니다. 그들의 신인식이란 남 골탕 먹이기를 즐기는 개구쟁이 하나님 수준입니다.
주님, 믿음이란 의심을 극복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저 역시 볼 것은 보지 못하고 간과하여도 될 것에 집착하여 의심하고 머뭇거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는 지성과 믿음을 주십시오.
2024. 1. 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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