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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론
신명기 1:34~46
우리말에 ‘평안감사도 자기가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아무리 좋은 기회를 주어도 억지로 할 수는 없습니다. 좋은 기회를 자기 의지로 받아들일 때 그 효과는 극대화되어 감사하기 마련입니다. 가데스 바네아 사건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귀한 선물을 준비하셨는데 이스라엘이 이를 스스로 거부한 격입니다. 분노하신 하나님은 “이 악한 세대의 사람들 가운데는, 내가 너희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1:35)며 약속의 땅 가나안 땅 진입을 38년이나 지연하셨습니다. 심지어 모세조차도 그 땅에 들어감을 허락받지 못하였으니 하나님의 화가 얼마나 상당하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37). 다만 그런 중에도 갈렙과 여호수아만은 예외가 인정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도자론’을 생각해 봅니다. 성경은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백성과 함께 광야에서 삶을 마쳤다고 기록합니다(34:5). 만일 출애굽 1세대 모두가 들어가지 못하는 약속의 땅에 모세만 들어갔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물론 우리는 모세의 신앙과 인품, 그리고 지도력의 탁월함에 공감합니다. 그가 시작한 출애굽이니 그가 끝도 보아야 한다는 사실에 이견이 없습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으로 모세에게 출애굽의 완성을 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모세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으나 성경 어디에도 모세가 이를 불만스럽게 생각했다는 구절이 없는 것으로 보아 모세도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잘 이해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가나안 땅 진입 거부를 수용하는 모세에게서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지도자는 군중과 함께 하는 존재입니다. 군중 없는 지도자는 없습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더 나아가 백성의 짐을 대신 집니다.
오늘 우리는 품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가 지도자 노릇하는 시대를 살아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절차에 따랐으니 그 질서를 훼손해서는 안 되지만 그래도 보기에 민망할 때가 많습니다. 시민을 우습게 여기고, 특히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를 무시하고 민족의 자존감을 훼손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발언들을 들을 때면 ‘아차’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국가 운영 철학은 찾기 힘들고 차별과 비하와 적대감을 조장하는 정제되지 않은 말을 남발하고 이념의 갈등을 부추기는 일을 예사로이 합니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시민을 반국가세력으로 모는 일은 국가 지도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힘을 숭배하고 미신과 술에 허우적거리며 패거리를 일삼는 이가 ‘패거리 카르텔 타파’를 운운하는 현실은 한 편의 코미디입니다. 더 꼴불견은 본받을 것 하나 없는 이를 추앙하는 이들입니다. 그 무지와 패악이 불쌍하고 측은합니다. 여기에는 상당수 교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 가나안 진입에서 배제된 모세를 통하여 진정한 지도자란 어떤 존재인지를 배웁니다. 좋은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도 버리는 법입니다. 좋은 지도자를 분별하는 지혜를 이 땅에 허락하여 주십시오.
2024. 1. 3(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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